남북전쟁 중에 금 투기…월가, 2위 금융시장으로
남북전쟁 중에 금 투기…월가, 2위 금융시장으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3.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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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이모저모(14)…애국심 없는 투기세력, 링컨의 분노에도 장외거래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은 참혹했다. 당시 미국인구의 3% 해당하는 100만명 이상이 부상당하고, 군인들만 62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860년 통계를 기준으로 남성 13~43세 인구중 백인의 8%가 전쟁에서 죽었다는 통계가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신대륙을 개척한 유럽의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둘로 갈라져 1815년 나폴레옹 전쟁과 19131차 대전 사이 100년 가까운 시기에 인류 최대의 전쟁을 벌인 것이다.

 

전선에서 피비린내가 풍겨나오는 가운데 뉴욕의 금융시장에선 돈 냄새가 펄펄 났다. 뉴욕의 투기자들에게서 애국심이란 기대하기 어려웠다. 북부의 영토인 뉴욕에서 남부 로버티 리 장군의 꼬붕들이 남군이 승리하기를 기원했다. 남군이 이기면 금값이 폭등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북이든, 남이든 소속감이 없었다. 주인은 돈이었고, 이윤추구의 노예들이었다.

 

1862년에 첫 발행된 그린백의 앞면과 뒷면 /위키피디아
1862년에 첫 발행된 그린백의 앞면과 뒷면 /위키피디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북군의 전비 조달을 위해 개전초기인 186175,000만 달러 규모의 요구불 지폐(Demand Notes)를 발행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의회가 먼저 나서서 18623월 북부 연방의 법정통화(legal tender)로 지폐를 찍어냈다. 지폐의 뒷면을 초록색으로 인쇄했다 하여, 이를 그린백(green back)이라고 했다.

내전 이전까지 미국은 금과 은만을 법정통화로 인정했다. 지폐가 발행되었으나, 주의 인가(state chartered)를 받은 은행이 금으로 태환(교환)해주는 조건으로 찍어낸 것이며, 법정통화는 아니었다. 연방정부가 그린백을 법정통화로 인정하면서 주 인가은행의 지폐는 사라졌다.

링컨 행정부는 그린백 1달러를 금 1달러로 교환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하지만 그린백 지폐는 태환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금과 그린백 사이에 가치의 괴리가 생겨났다. 북부 연방군이 승리하면 그 갭이 줄어들고, 패배하면 지폐의 가치가 떨어지고 금값이 올라갔다. 금 투기자들은 남부군이 이기길 바랐다.

 

1867년 뉴욕 브로드 스트리트 /위키피디아
1867년 뉴욕 브로드 스트리트 /위키피디아

 

뉴욕증권거래소도 당시 금을 거래했다. 금 트레이더들은 남부군이 이기기는 것에 베팅을 걸었다. 그들은 남군이 이기면 남쪽의 유행가 딕시(Dixie)를 부르며 환호했다. 링컨 대통령이 그 이야기를 듣고 저들의 사악한 머리통을 부셔버려야 한다고 노발대발했다. 링컨은 뉴욕증권거래소에 금 거래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잠시 금 거래가 중단되고, 투기자들이 사라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새 월스트리트 인근에 있는 윌리엄 스트리트와 브로드 스트리트의 지하로 들어가 금을 거래했다.

그들은 길핀 뉴스룸(Gilpin's News Room) 또는 길핀 골드룸(Gilpin's Gold Room)이라는 금 거래소를 만들었다. 길핀이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길핀 뉴스룸의 연회비는 처음에 25달러였다. 이곳에 투기자들이 수백명 몰렸다. 연회비는 재빠르게 올라 200달러가 되었고, 1,000달러, 2,500달러까지 치솟았다.

 

투기자들은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이 없었다. 작은 정보 하나에도 그들은 귀를 기울였고, 정보를 얻기 위해 양쪽에 정보원을 심기도 했다. 투기꾼들은 정부보다 더 먼저 전황을 파악했고 있었다. 게티즈버그 전투(1863)의 전황을 링컨 대통령보다 뉴욕의 금 투기자들이 먼저 알았다고 한다.

금 투기꾼의 하나가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이었다. 그는 후에 미국 금융권을 장악하는 J.P. 모건의 창립지다. 모건은 징집영장이 나왔지만 300달러를 주고 다른 사람을 군에 보내고, 무기거래로 돈을 벌었다. 그후 금 투기에 뛰어들어 16만 달러를 벌었다고 한다.

 

금괴 /위키피디아
금괴 /위키피디아

 

언론도 금 투기에 가담했다. 1964518일 아침신문에 대형 오보가 발생했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뉴욕월드(New York World)와 저널오브커머스(The Journal of Commerce)라는 두 신문이 링컨 대통령이 북군을 강화하기 위해 40만명을 징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기사를 동시에 내보냈다. 븍군이 위기에 처했다는 신호였다. 이 기사를 보고 투기자들은 금 매집에 나섰다. 이날 금값은 10% 폭등했다.

가짜뉴스였다. 링컨 대통령이 노발대발, 보도경위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두 신문을 정간시키고 편집장들을 체포하라고 했다.

두 신문의 편집장들은 AP 통신을 받았다고 해명했다. AP는 그런 기사를 내보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누가 한 짓인가. 수사당국이 조사를 벌인 결과, 브루클린이글(Brooklyn Eagle)이란 신문의 편집장 조지프 하워드(Joseph Howard, Jr.)의 소행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하워드는 전날 금을 매집했다. 그는 계략을 짰다. 당시 통신선이 없던 시절이라, 통신기사는 배달원에 의해 언론사에 전해졌다. 하워드는 배달원을 고용했다. 그는 AP발 거짓 기사를 작성해 배달원에게 언론사에게 돌리라고 했다. 기사 전달 시간은 야간 편집장이 퇴근하고, 당직기자만 남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남은 당직자의 판단에 의해 두 신문사가 뉴스를 내보냈던 것이다.

다음날 하워드는 전날 산 금을 팔아 치워 상당한 이익을 챙겼다. 하워드는 나중에 체포되어 3개월 감옥살이를 했다. (그 가짜뉴스는 결국엔 맞았다. 링컨은 8월에 50만명의 징집을 명령했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연방의회는 1864617일 정식인가를 받은 브로커 사무실 이외의 장소에서 금 거래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길핀 뉴스룸은 폐쇄되었다. 하지만 투기자들은 더 음습한 곳으로 스며들어 투기를 벌였다. 금과 그린백의 갭은 더 커졌다. 100달러가 그린백 287달러까지 치솟았다. 오히려 법이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의회는 2주만에 그 법안을 폐기하고 말았다.

 

18641014일 음성적으로 운영되던 길핀 뉴스룸은 정식적으로 뉴욕 금거래소(New York Gold Exchange)를 발족하고 양성화되었다. 제임스 콜게이트(James Boorman Colgate)가 금 거래소 의장을 맡고, J.P. 모건이 창립멤버로 들어갔다. 이때 피어폰트는 런던에서 금융업을 하던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Junius Spencer Morgan)과는 별도로 뉴욕에서 독자적으로 금융업의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남북 전쟁 기간에 엄청나게 성장했다. 전쟁으로 연방정부의 부채가 40배 증가하는 것과 같은 규모로 덩치를 키웠다. 연방정부의 채권은 월스트리트에서 소화되었고, 뉴욕금융가는 런던에 이어 세계 제2의 금융시장으로 급부상한다.

뉴욕 금거래소는 1865년 뉴욕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에 합병되어 하나의 부문으로 운영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Greenback (1860s money)

Wikipedia, New York Gold Exchange

Wikipedia, Civil War gold ho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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