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웅의 동해해류연구⑤…이사부 장군의 항로
이효웅의 동해해류연구⑤…이사부 장군의 항로
  • 이효웅 해양전문가
  • 승인 2021.03.1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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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강릉 출항지설…오화리산성과 오십천 수심으로 삼척설 유력

 

. 이사부함대의 동해 항로

 

1. 실직 군주 이사부

 

이사부는 내물왕의 4세손으로 지증왕이 등극한 후 신라 변방의 관리로 있으면서,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때 장군 거도(居道)가 마숙(馬叔)놀이로 가야 소국인 거칠산국(居漆山國)과 우시산국(于尸山國)을 복속시킨 계책을 그대로 응용하여 가야를 점령하였다고 전해온다. 이후 505년에 실직 군주로 명받고 7년 정도 있으면서 신라의 옛 영토를 수복하고 동해 제해권을 넓혀나갔다. 당시 신라는 북쪽의 고구려와 전쟁을 하여 국경이 안정되지 않았다.

468(자립 마립간 11)에 고구려는 말갈 군사 1만 명과 함께 실직성을 습격하였다. 신라는 9월에 하슬라의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징발하여 이하(泥河에 성을 쌓았다. 481(소지 마립간 3) 2월 봄에 왕이 북쪽의 비열성(比列城, 안변)까지 행차하여 군사를 위무하였으나, 3월에는 고구려가 북쪽에 침입하여 7성을 함락하고 이어 동해안의 미질부(彌秩夫, 포항 흥해)까지 진군하였다. 신라에서는 백제와 가야의 도움을 받아 이하 서쪽에서 쳐부수고 일천 명의 목을 베었다. 주1)

신라는 주로 동해안을 따라 미질부(흥해)에서 실직(悉直, 삼척), 하슬라(何瑟羅, 강릉), 비열(안변)로 이동하였고, 고구려의 침입 경로는 남한강 상류로 이동하여 백두대간의 대관령을 넘어 실직으로 이동하였다고 추측된다. 신라에서 504(지증왕 5) 9월에 동해안에 12개의 성을 쌓고 동해안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사부는 505년 실직 군주에서 512년 하슬라 군주로 이동한 기간은 7년 정도로 당시 20대 초반의 원기 왕성한 이사부가 7년 동안 실직에 머물렀던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명받을 때는 옛 신라의 영토를 수복하는 임무였을 것이다. 실직에서 오래 있었던 것은 다른 임무보다는 난관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이사부는 결과적으로 우산국 주2)을 정복하여 신라의 위상을 높이고 왜의 침략을 억제하였으나 이사부가 처음부터 지증왕의 명으로 우산국 정벌 계획을 갖고 실직 군주로 온 것은 아니라고 본다.

 

2. 이사부 장군의 수륙양동작전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있으면서 하슬라에 입성하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고구려의 잔존 세력들이 옥계와 강릉 사이에 있는 피래산(彼來山, 754m)과 기마봉(383m) 사이의 밤재나 화비령(火飛嶺)에 막혀 갈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사부는 전략·전술가로 백병전과 같은 무리한 전투를 하지 않는다. 전선(戰船)을 이용한 수륙양동작전(水陸陽動作戰)으로 선박을 많이 만들어 적의 후방인 안인(安仁) 봉화산(60.7m) 인근에 상륙시켜 적의 후방을 급습하여 섬멸하고 하슬라에 입성하였다. 512년 봄에 하슬라 군주가 되고 여름에 우산국 정벌에 나섰다. 이사부의 수륙양동작전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으나 이사부가 실직에서 5~6년은 전함을 설계하고, 배와 목우사자를 만들고, 우산국을 정탐하는 등 우산국 정벌 준비하는 세월이었다. 이사부가 수륙군(水陸軍)으로 왔다면 하슬라에 입성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신라의 수군이나 전함(戰艦)을 살펴보면, 467(자립 마립간 10) 봄에 전함을 수리하였다. 그러나 지증왕이 등극하기 직전인 500년 봄 3월에 왜병들이 울산의 장봉진을 함락하였다. 신라의 전함들은 수도인 금성(金城)을 지키기 위하여 울산만 주변 여러 곳에 진을 설치하여 왜구들을 방어하였다.

왜구들이 울산항에 침입하면 제일 먼저 전함과 진지를 공격하고, 서라벌로 진군하여 마을에서 식량, 가축, 부녀자, 아이들을 마구 포획하여 갔다. 신라는 주로 육상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었으나 해상 전투의 기록은 미미하거나 전무하였으므로 실직까지 출동할 전함은 없었다.

이사부는 실직 군주로 있으면서 실직성을 정비하고 하슬라로 진군하려고 하였으나, 적이 거세게 저항하므로 수륙양동작전을 계획하고 전함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사부는 젊은 나이로 전함 제작에 대한 지식이 없어 왕께 주청하여 선박을 만들 목수를 요청하였다. 50511월에 나라에서는 선박 이용에 관한 제도를 제정하여 선박 제작의 기술자나 목수들을 모집하여 실직으로 보내어 전함 제작을 도왔다.

실직의 오십천(五十川) 주3)하류는 수심이 깊고 수량이 많아 큰 선박의 접안이 가능하고 고성산(古城山, 99.6m), 광진산(139m) 등 주변을 감시하기 좋은 봉우리가 있다. 주변에는 선박 제작에 좋은 소나무 등의 침엽수림이 많아 목재를 구하기가 좋았다. 오십천 하류에는 소천평야, 갑자평야, 삼각주가 있어 큰 배를 만들기가 좋은 지역이다. 이사부는 동해의 특성을 파악하고 목수들과 함께 새로운 전함을 설계하였다. 새로운 전함을 구상하면서 신라의 염원이었던 왜에 대한 복수를 꿈꾸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신형 전함을 이용하여 고구려 군사를 소탕하고 아울러 실직 앞에 있는 우산국을 정벌하여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전략을 구상하였다.

481(소지 마립간3) 2월에 왕이 비열성(안변)에 행차하여 군사들을 위무하였으나, 3월에는 고구려군이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7성을 빼앗고 이어 동해안을 따라 미질부(흥해)까지 진군하였다. 그 후 고구려의 잔존 세력들은 옥계와 안인 사이의 산악에 진을 치고 하슬라의 길목을 차단하였다. 이 지역은 실직과 하슬라의 경계로 산악지역에 익숙한 고구려 군사들이 주요 교통로에 매복하고 있으면 신라군은 진군하기 쉽지 않다. 이사부는 고구려의 잔존 세력을 물리칠 계책으로 수륙양동작전을 구상하고 실직에서 전함을 많이 만들어 북으로 40km 떨어진 안인 봉화산 인근에 상륙하여 후미를 기습하여 소탕하였을 것이다.

안인에는 이와 관련된 이사부바위와 사자바위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동해안 바위설화 주4)에 나오는 이사부바위와 포구가 실제 있었고, 안인 봉화산 앞의 해변에는 검은 사자바위가 있었다.(마을 원로의 증언을 들었음) 그리고 조금 떨어진 밤재와 화비령 사이 마을에서 산성 모퉁이 마을(산성우리)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마을 사람들이 어릴 때 산위의 진지(삼한성지?)와 같은 곳에서 놀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림 27) 산성우2리 명패
(그림 27) 산성우2리 명패
(그림 28) 삼한성지 네이버, 강릉시 강동면 산성우2리
(그림 28) 삼한성지 네이버, 강릉시 강동면 산성우2리 주16)
(그림 29) 안인 사자바위
(그림 29) 안인 사자바위
(그림 30) 안인 이사부바위와 이사부포구(매립)
(그림 30) 안인 이사부바위와 이사부포구(매립)
(그림 30) 안인 이사부바위와 이사부포구(매립)
(그림 30) 안인 이사부바위와 이사부포구(매립)

 

이사부는 하슬라에 입성하여 512년 봄 하슬라 군주로 부임하여 다음 계획인 우산국 정벌계획을 세웠다. 하슬라에서 원정에 필요한 군사와 물자를 보충하여 6월에 실직항에서 목우사자를 싣고 우산국 정벌에 나섰다.

이사부 함대의 출항지설은 실직과 하슬라로 나눠져 하슬라설은 심현용 주5), 홍영호 주6), 이성주 주7), 이규대 주8), 박도식 주9)선생이 삼국사기와 고분 자료에 근거하여 주장하며, 남대천 하류의 안목항이나 강문항을 지목하였다. 그러나 안목항은 갯바위가 많은 작은 어촌 포구라 전함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강문항은 경포 석호의 입구로 수심이 낮아 큰 선박이나 많은 선박을 안전하게 접안할 수 없다.

삼척(실직)설은 유재춘 주10), 장동호 주11), 윤명철 주12), 이상수 주13), 손승철 주14), 이효웅 주15)선생이 오화리산성과 오십천의 깊은 수심을 들어 자연항으로 선박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고 울릉도와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삼척항을 주장한다.

 

주1) 김부식,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권 제3, 소지마립간 3, p112

주2) 『삼척향토지, 실직 속현[屬縣], 삼척시립박물관 조사연구총서[27], 2016, p10

주3) 『삼척향토지, 삼척시립박물관 조사연구총서[27], 2016, p90, 오십천(五十川)은 우보산(虞甫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물이 오십 여울을 돌아서 흐른다. 동산(東山) 협구(峽口)에 이르면 쌍석(雙石)이 있는데 높이가 각각 천 길이고, 그 아래 칠암(漆巖) 적벽(赤壁)은 모두 산수(山水)가 기이한 곳이다.

주4) 이승철 외, 강원도 동해안 바위설화, 강원도환동해본부, 청송출판사, 2016, p61, ‘이사부바위는 안인진 마을에 있는 통일공원 앞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전에 이 바위 부근에 이사부 배가 많이 들어와 정박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고 하였다.

주5) 심현용, 고고자료로 본 신라의 강릉지역 진출, 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p29~55.

주6) 홍영호, 6~7세기 신라의 고고자료로 본 동해안과 울릉도, 이사부, 새로운 동해의 시대를 열다.(한국이사부학회 창립기념 학술대회), 한국이사부학회, 2009, p83

주7) 이성주, 군주 이사부에 의한 울릉도 정벌의 역사적 맥락 재구성」 『신라의 동해안 진출과 하슬라군주 이사부의 우산국 복속(인문학술연구총서2), 해람기획, 2010, p9~75

주8) 이규대, 영동지역 소국의 복속 관계와 이사부의 동북진출 및 우산국 복속, 신라의 동해안 진출과 하슬라군주 이사부의 우산국 복속(인문학술연구총서2), 해람기획,2010, p85~112

주9) 박도식, 이사부와 강릉과의 관계, 신라의 동해안 진출과 하슬라군주 이사부의 우산국 복속(인문학술연구총서2), 해람기획,2010, p115~159

주10) 유재춘, 삼척지역의 해양도시적 성격과 김이사부 선단의 출항지 검토」 『이사부와 동해2, 한국이사부학회, 강원도민일보사, 2010, p39~85.

주11) 장동호, 동해안 항포구의 자연환경 및 GIS 분석을 통한 우산국 정복의 출항지 연구」 『이사부와 동해2, 한국이사부학회, 강원도민일보사, 2010, p217~256.

주12) 윤명철, 삼척지역의 해양 도시적 성격과 김이사부 선단의 출항지 검토」 『이사부와 동해2, 한국이사부학회, 강원도민일보사, 2010, p87~141.

주13) 이상수, 유적을 통해서 본 이사부 출항지 검토」 『이사부와 동해2, 한국이사부학회, 강원도민일보사, 2010, p143~215.

주14) 강봉룡 외, 이사부 삼척 출항과 지역민 역할」 『이사부 삼척 출항과 동해 비젼7, 강원도민일보사, 2010, p306~341

주15) 이효웅, 이사부, 삼척출항의 재조명」 『이사부와 동해11, 한국이사부학회, 강원도민일보사, 2016, p213~255.

주16) 네이버, 강릉시 강동면 산성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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