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웅의 동해해류연구⑥…삼척 항로
이효웅의 동해해류연구⑥…삼척 항로
  • 이효웅 해양전문가
  • 승인 2021.03.1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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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와 이틀 이상 거리…기상 잘 선택하고 바람 잘 다스려야

 

3. 삼척(실직) 항로

 

삼척에서 울릉도까지 약143km(77해리), 독도까지 238km(130해리)이다. 과거부터 삼척항은 동해안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오십천 하류의 육향산(삼척포진) 앞 자라소부터 수심이 깊어 자연항구가 발달하였다.

 

(그림 31) 1930년대(김진원 소장, 위)와 1970년대의 정라진(아래)
(그림 31) 1930년대(김진원 소장, 위)와 1970년대의 정라진(아래)

 

울릉도는 삼척에서 약 143km 정동방에 있으며, 옛부터 이틀 이상의 거리인 울릉도를 항해하기 위하여 기상을 잘 선택하고 바람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했다. 오늘날 요트들은 선저에 킬이 있어서 45도의 크로스 항해나 지그재그 항해가 가능하여 풍상항해가 가능하나, 옛날의 풍선(돛단배)들은 방향키 하나만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므로 적당한 바람이 아니면 항해가 어렵다. 기압은 수시로 바뀌어 바람을 일으키고 방향이 변하므로 범선항해는 측풍을 얼마나 잘 이용하느냐에 달렸다.

동해·삼척에서 요트와 카약으로 세일링해 보면 여름철은 동해의 특성상 아침·저녁에는 무풍 또는 미풍이며, 낮에는 남풍 계열(남동풍, 남풍, 남서풍)의 바람이 분다. 과거 동해 항해는 삼척포에서 새벽에 출항하여 미풍에 노를 주로 사용하여 남쪽이나 남동쪽으로 남하하다 남풍을 받아 항해를 한다. 또 울릉도와 같이 원양 항해는 남쪽의 장오리항이나 죽변항에서 출항 준비와 제를 마치고 서풍이 불 때 까지 기다려 바람이 불면 항해를 하였다. 반대로 귀항 때는 울릉도 대풍감에서 동풍을 받아 항해하였다.

울릉도 항로 중간의 조경 수역은 한류와 난류가 만나 안개가 자주 끼고 파도가 세어지므로 울릉도를 항해하는 선박들은 바람, 파도, 안개, 무풍 등과 싸워야 하며 일행들과 이탈에도 대비하여야 한다.

 

(그림 32) 1960~1980년대 삼척 초곡(위)과 삼척 광진(아래)의 무동력 선박들
(그림 32) 1960~1980년대 삼척 초곡(위)과 삼척 광진(아래)의 무동력 선박들

 

과거 범선들의 항해와 항로를 조선시대 수토사인 장한상과 박종원의 울릉도 항해에서 살펴보면,

 

자료 1. 장한상의 울릉도 사적(事蹟)

 

장한상이 울릉도를 수토하면서 기록한 내용을 1864년 외손이 옮긴 울릉도사적에는 삼척영장(三陟營将) 장한상(張漢相)919일 사시(巳時)경 삼척부(三陟府) 남면장오리나루(南面荘五里津)에서 바람이 일기를 기다려 배를 출발시켰는데 이미 보고된 내용에 근거해 유재과(有在果) 첨사(僉使)와 별천역관(遣譯官) 안신미(安慎微)가 각 방면의 일꾼과 사공, 격군(格軍) 도합 150명을 거느려 기선(騎船) 각기 한 척, 급수선(汲水船) 4척에 배의 크기에 따라 나누어 싣고 그날 사시(巳時)경 서풍이 일면 바다로 진입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기로 하고 술시(戍時)에 바다에 들어서니 큰 파도가 험하게 일어 반드시 5리 밖에 있는 이진(二震) 물마루로 가야 하였다. 하지만 배들이 파도에 부딪쳐 산산이 흩어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달 20일 자시(子時)에 점차 깊은 바다에 들어서게 되었다. 먹구름이 북쪽으로부터 하늘을 뒤덮으며 몰려왔고 번개가 번쩍이고 그림자가 퍼런 파도 위에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광풍이 일며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성난 파도가 하늘에 치솟고 구름과 바다가 한데 뒤엉켜 타고 있던 배들이 파도에 삼켜버렸다가 다시 나타나곤 하여 그 위험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이 경황실색하여 이리저리 쓰러지는데 엎친데덮친 격으로 기선(騎船)의 키가 부러져 도저히 배를 제어할 방도가 없었다. 노목(櫓木)을 배 꼬리와 좌우에 꽂아 그 힘을 빌어 지탱하긴 하였지만 수시로 배가 전복될 수 있었다. 마침 바람과 비가 점차 멎더니 하늘이 희끄 므레 밝아졌다. 섬은 북쪽에 보이는데 물은 동으로 흘렀다. 배에 탄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힘을 다하여 노를 저어 뱃머리를 섬으로 돌려 나아갔다. 죽을 힘을 다해서 사시(巳時)에 섬의 남쪽 켠 닻줄을 맬만한 바위가 많은 모퉁이에 이르러 잠시 육지에 올라가 밥을 짓고 있는데 급수선(汲水船) 4척이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으나 복선(卜船)은 어데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유시(酉時)에 또 남쪽 바다로부터 배가 들이 닿아 모든 배들이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주1)

 

수토선은 919일 삼척 장오리항에서 대기하다가 920일 서풍에 출항하였으나 폭풍을 만나 2대의 병선과 4대의 급수선이 모두 흩어졌다. 그러나 다음날 늦게 모두 무사히 울릉도에 도착하여 울릉도를 살피고 16일 만에 삼척으로 돌아왔다.

 

자료 2. 삼봉도 경차관(三峯島敬差官) 박종원(朴宗元)의 울릉도 항해

 

성종 3년 임진(1472)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극돈(李克墩)이 치계(馳啓)하기를, “삼봉도 경차관(三峯島敬差官) 박종원(朴宗元)이 거느린 군사와 더불어 4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지난 528일에 울진포(蔚珍浦)로부터 출발하여 가다가 곧 큰 바람을 만나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박종원의 배는 동북쪽으로 가서 29일 새벽에 동남쪽을 향하여 무릉도(武陵島)를 바라보니 15리 쯤 되었다. 다시 큰 바람을 만나 닻줄[]이 끊어져서 대양 가운데로 표류(漂流)하여 동서를 알지 못한지 7주야가 되었다가 이달 초 6일 오시에 간성군(杆城郡)의 청간진(淸簡津)에 이르렀습니다.”하였다.

다행이 사직(司直) 곽영강(郭永江) 등의 세 배는 지난 529일에 무릉도에 이르러 3일을 머물렀는데, 섬 가운데를 수색(搜索)하여 보니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옛 집터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하였고, 6월 초6일에 강릉(江陵) 우계현(羽溪縣) 오이진(梧耳津)으로 돌아왔다. 주2)

 

위의 두 자료에 보듯이 수토사들의 항로는 삼척보다도 남쪽의 장오리포와 울진포에서 출항하였고, 귀항할 때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간성 청간정과 강릉 우계현, 삼척으로 귀항하였다. 과거 동해의 울릉도 항해가 쉽지 않다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지방관이나 수토사들이 울릉도 수토를 기피하기도 하였다.

 

주1) 숙종실록, 숙종 20(1694), 장한상

주2) 성종실록, 성종3(1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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