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드, 21세기판 그레이트게임…입지 좁아진 한국
쿼드, 21세기판 그레이트게임…입지 좁아진 한국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3.13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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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와 달리 미국 주도, 상대는 중국으로 전환…구한말 상황 재연되나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놓고 그레이트게임’(The Great Game)을 벌였다. 정치외교 용어로 정착된 그레이트게임은 정확하게는 1830년부터 1차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말한다. 그레이트게임은 러시아가 남진정책을 추진하자, 영국이 인도를 중심으로 이를 저지하는 가운데서 비롯되었다. 영국은 18421월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군인과 가족등 16,000명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렇게 피를 흘리며 싸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말에 극동아시아로 옮겨간다. 영국에겐 극동아시아가 너무 멀었다. 이때 극동의 패권을 노리는 일본이 영국과 손을 잡는다. 1902년 영일동맹은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에서 체결된 조약이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호주를 식민지로 개척했다. 일본과 손을 잡았다. 영국은 인도-호주-일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러시아 포위망을 형성한 것이다. 영국과 손잡은 일본은 청나라와 러시아와 싸워 승리한다.

 

한 세기의 이상이 지난 지금, 그레이트게임이 부활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인도, 영연방국가인 호주, 일본, 그리고 미국이 쿼드(Quad)라는 새로운 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중심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동맹의 일원은 일본, 호주, 인도로 여전하다. 또다른 점은 포위의 대상이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란 사실이다.

 

쿼드 4개국 /위키피디아
쿼드 4개국 /위키피디아

 

미국 시간으로 12,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호주 스콧 모리슨 총리가 첫 쿼드 정상회담을 열었다. 코로나 위기 속에 화상으로 진행되었다. 네 정상은 연내에 대면 정상회담을 열고, 외교장관이 자주 소통하며 일 년에 최소 1회 회담을 하기로 했다. 이 기구를 상설화하겠다는 것이다.

4개국 정상은 회담후 성명에서 "우리는 인도-태평양과 이를 넘어 안보와 번영을 증진하고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초하고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 증진에 전념한다"고 밝혔다.

4국이 겉으로는 내세운 명분은 코로나 팬데믹 대응이다. 미국, 일본, 호주는 인도에 코로나 백신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인구로 중국에 버금가는 13억의 인도를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다. 중국이 지난해 카슈미르 산악에서 인도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인도는 미국을 등에 업고 중국을 포위하는 한 축으로 등장한 것이다.

 

성명에서 중국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제정세 분석가라면 누구나 이 4국 동맹이 중국을 포위하는 비공식 연합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성명은 북한과 미얀마, 남중국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성명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부합하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재확인한다면서 일본인 납치 문재의 직접적 해결을 촉구했다.

성명은 미얀마에 대해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국제해양법 준수를 촉구했다. 북한, 미얀마, 남중국해의 문제의 거론은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임을 시사하고, 특히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한 정책기조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전남 여수시 거문도의 영국군 묘 /여수시청
전남 여수시 거문도의 영국군 묘 /여수시청

 

우리나라는 중국과 쿼드 동맹국 사이에 끼어 있다. 19세기말 그레이트 게임때보다 더 복잡하다. 그땐 조선이란 나라 하나였다. 지금은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있다.

그레이트 게임이 확전하면서 18854영국은 우리 남해안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가 조선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그 섬을 2년간 점령하고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일인 파울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f)가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섰다. 묄렌도르프는 임오군란(882)을 진압한 후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외교고문으로 파견한 인물이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중립국론을 펼쳤다. 그는 러시아가 조선을 벨기에처럼 중립화를 추진할 것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885년 조선인으로 중립화론을 펼친 인물이 있었으니, 개화파 유길준(兪吉濬)이었다. 그는 중국 주도의 중립화가 러시아 남하를 막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유길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목구멍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의 벨기에와 같으며, 국제적 지위로는 터키의 속국인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 중립화는 유럽 열강이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 중립은 유럽 강대국들이 상호간 자국 보호를 위해 나온 것이다. …… 이를 우리가 먼제 제창할수 없으니, 중국이 주창자가 되어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 등에 요청해야 한다.”

 

당시 청이 조선반도에 주도권을 쥐던 시절에 조선 중립화론은 청이 조선의 속국 상태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주장에 그쳤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한후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하는 시기에 중립화론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시기의 배경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대륙세력에 청을 대신해 러시아가 등장하고, 해양세력인 일본의 외교적·군사적 역량이 보다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대사관으로 파천한다. 적의 적에 붙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한 것이다.

고종은 이듬해 환궁한 후에도 중립화론을 펼쳤다. 고종의 한반도 중립국 추진은 러시아·일본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고종은 러일 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나름 중립외교를 취하려 했다. 결국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전쟁 발발 직전인 19041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그 선언도 무위(無爲)로 돌아갔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 /위키피디아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 /위키피디아

 

10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우방이면서도 중국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박근혜 정권 때에도 대통령이 2015년 항일전쟁 승전 7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천안문 망루에 섰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 보수정부보다 더 중국에 경사되어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미국과 중국 사이에 등거리 외교의 입장을 취한 것의 연장선상이다.

19세기말 조선의 고종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고종임금은 지는 나라쪽에 계속 붙으려 했다. 그의 중립화론은 강대국에 의해 거절당했다.

지금의 한미 거리 조정도 어쩌면 19세기의 재판일수도 있다. 중국이 떠오른 나리라고 판단할수 있지만 아직은 허술한 구석이 많다. 중국은 홍콩의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미얀마 군부를 묵시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력이 급성장하고 있지만 트럼프 전 미국 행정부의 화웨이 규제에서 보듯, 무력하기 짝이 없다.

 

미국 주도의 쿼드 동맹은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억제 전략이다. 태평양과 인도양에 대한 중국의 진출을 봉쇄하려는 것이다. 이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선택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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