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쿠데타 실패 후 국민 영웅으로 부상하다
차베스, 쿠데타 실패 후 국민 영웅으로 부상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3.1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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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차베스의 실험②…23세에 혁명조직 결성, 쿠데타 실패 후 정계진출

 

우고 차베스는 19547월 베네수엘라 서부 사바네타라는 농촌마을에서 7냄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가 교사였고, 아버지는 사회기독교당(COPEI)의 열성당원으로 후에 차베스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바리나스 주의 주지사를 10년간 3연임하는 정치인으로 활동한다. 차베스는 어렸을 때 중산층에서 살아 그다지 가난하지 않았다고 한다.

차베스는 17살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정치사상에 눈을 떴다. 육사 생도 시절에 남미 독립혁명의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와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에 심취했다. 페루를 방문했을 때 좌파 대통령 후안 알바라도(Juan Velasco Alvarado)의 연설을 듣고 군인들이 노동자계급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육사를 졸업한 후 고향인 바리나스 주에 배속되어 좌익게릴라 진압부대의 통신장교로 발령받았다. 그는 한 게릴라 거점에서 다수의 좌파 서적을 발견해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에 관해 탐독하고, 특히 베네수엘라 좌파운동가 에제키엘 사모라(Ezequiel Zamora)를 흠모하게 되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그는 게릴라 거점을 공격했을 때 군인들이 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노동대중에 봉사하는 공산계열의 적기당(Red Flag Party)의 강령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또 군대 내의 부패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육사 생도 시절의 차베스 /위키피디아
육사 생도 시절의 차베스 /위키피디아

 

차베스의 혁명활동은 23살이던 1977년부터 시작된다. 그는 군대 내에서 장차 베네수엘라 인민해방군들 양성하겠다는 계획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는 소수의 동지들을 규합해 극좌와 극우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정치적 지향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차베스와 그와 동료들은 초기에 구체적인 방향을 설정하지 못했으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가입시키면서 점차 좌파로 경도되어 갔다. 이 때까지만 해도 차베스의 조직은 학습서클에 불과했다.

 

차베스가 군대 내에서 본격적으로 정치조직을 만든 것은 28살이 되던 1982, 볼리바르 혁명군-200(Bolivarian Revolutionary Army-200)을 조직하면서였다. 이 조직은 볼리바르와 사모라, 볼리비아의 좌파 사상가 시몬 로드리게스(Simón Rodríguez) 3인을 사상적 뿌리로 삼았다. 이 조직의 끄트머리에 200이란 숫자는 조직원수가 200명이 된다는 뜻과 시몬 볼리바르(17831830)가 탄생한지 200년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때 차베스는 모교인 육사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생도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켜 상당수를 조직원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군대 내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낌새가 상부에 보고되어, 그는 국경지대로 전출되었다. 차베스가 발령받아 간 아푸레 주는 소수 원주민 인디오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인디오들의 삶에 동정심을 품어 소수종족 보호정책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차베스는 한 장군의 눈에 들어 1988년에 다시 수도 카라카스에 돌아가 근무하게 된다. 그는 군대로 혁명정부를 수립할 때를 기다렸다.

 

1980년대 중반이후 국제유가가 폭락했다. 유가가 좋을 때 해외은행에서 흥청망청 돈을 빌려 쓰던 베네수엘라는 부채에 허덕이게 되었다. 1983년 현지 통화 볼리바르는 폭락하고 베네수엘라는 해외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어 결국 IMF에 손을 내밀고 말았다. 게다가 이웃 콜롬비아와는 국경분쟁이 격화되었다.

1988년에 민주행동당(AD)의 카를로스 페레스(Carlos Andrés Pérez)가 두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레스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절대로 IMF의 긴축정책 요구를 받아들지 않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막상 대통령이 되니, IMF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수 없었다. 국가 파산을 방치할수 없는 노릇이었다.

 

차베스는 우선 민주행동당(AD), 사회기독교당(COPEI)이 권력을 나눠 먹는 푼토피호 협정(Puntofijo Pact)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협정은 1958년에 3개 정당이 연립정당을 구성하기로 한 야합성 합의였는데, 중도에 민주공화연맹(URD)이 떨어져 나가면서 ADCOPEI2개 정당만이 권력을 나눠 먹었다. 푼토피호 협정을 깨트리지 않는한 사회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을 기회가 없다는 것이 그와 동지들의 생각이었다. 차베스는 군대 내 조직 혁명운동세력을 규합했다.

 

페레스 정부는 IMF 요구에 따라 신자유주의 정책을 선택하게 되었고, 긴축재정의 일환으로 국가보조금을 대폭 삭감했다. 1989년초 페레스 정부가 유가보조금을 철폐하는 바람에 휘발유 가격이 100% 인상되고, 교통요금이 30% 올랐다.

국민들은 정부의 조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산유국이라고 떵떵거리더니 갑자기 기름값을 두배나 올린데 대해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1992년 쿠데타 실패후 체포 직전에 기자회견하는 차베스 /위키피디아
1992년 쿠데타 실패후 체포 직전에 기자회견하는 차베스 /위키피디아

 

중령이던 차베스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는 군내 사조직인 볼리바르 혁명군-200’ 연락망을 통해 쿠데타를 기도했다. D-데이는 199224일로 잡았다. 그는 다섯 개 부대를 지휘하며 카라카스 도심지로 진격했다. 대통령궁과 국방부, 군사공항을 점령하고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는 페레스 대통령을 체포할 계획이었다. 임시 대통령으로 라파엘 칼데라를 세우는 것도 계획에 넣었다.

하지만 차베스의 지지세력은 군부 내에서도 10%에 불과했다. 중도에 배신자가 있었고, 우물쭈물하며 군대를 빼돌리지 못하는 동조자도 있었다. 차베스는 쿠바의 카스트로가 했던 것처럼 방송국을 장악해 시민들의 혁명 가담을 선동할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페레스 정부의 진압군이 밀려들면서 쿠데타군은 지리멸렬로 쫓기고 그 틈바구니에서 50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80명의 시민이 부상당했다.

차베스는 주모자인 자신이 스스로 자수함으로써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아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체포되어 공영방송에 출연해 쿠데타군의 작전중단을 지시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방송에 나왔다. 수많은 국민들이 그 방송을 지켜 보았다. 그는 방송에서 혁명군의 작전중단을 명령했다. 아울러 그는 지금 당장(por ahora) 혁명이 실패했을 뿐이라고 한마디 더 했다. 그의 이 짧은 한마디가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지금은 실패했지만 언젠가 다시 가난의 질곡에서 해방시키리라는 희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차베스를 미디어 스타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이 쿠데타의 영향을 받아 수도 카라카스에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 나왔고, 군대와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백명이 사망했다. 19892월에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동을 카라카소(Caracazo)라 부른다.

 

차베스의 쿠데타 실패 직후 카라카스에서 벌어진 시위 /위키피디아
차베스의 쿠데타 실패 직후 카라카스에서 벌어진 시위 /위키피디아

 

차베스는 감옥에 보내졌고, 페레스 정부는 차베스를 지지하는 언론을 탄압했다. 그해 11월에 또다른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페레스 대통령은 1년후 탄핵되어 권좌에서 물러났고, 그 다음에 차베스가 쿠데타로 옹립하려던 사회기독교당의 라파엘 칼데라(Rafael Caldera)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칼데라는 차베스 쿠데타에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차베스는 수감 2년만에 풀려났다. 칼데라 정권은 차베스를 석방하면서도 군으로의 복귀는 허용하지 않았다.

차베스는 민간 정치인으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섰다. 그는 전국을 돌아디니며 사회주의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푼토피호 협정의 무효화를 주장했다. 아울러 아르헨티나, 우르과이, 칠레, 콜롬비아, 쿠바를 방문하면서 남미 국가의 지지를 호소했다.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가 그의 지지자가 되어 줄 것임을 약속했다.

 

1995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한 차베스 /위키피디아
1995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한 차베스 /위키피디아

 

1997년 차베스는 지지자들을 규합해 제5공화국운동(Fifth Republic Movement)이라는 정당을 창당했다. 이어 1998년 대선전에 뛰어들었다. 그는 그해 대선에서 55.2%를 얻어 푼토피호 협정을 맺고 있는 2개 거대정당의 연합후보 살라스 뢰머(Henrique Salas Römer)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Hugo Chávez

Wikipedia, Revolutionary Bolivarian Movement-200

Wikipedia, 1992 Venezuelan coup d'état attemp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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