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봉 돌아야 하나”…세계물류업계 수에즈 비상
“희망봉 돌아야 하나”…세계물류업계 수에즈 비상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3.2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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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물류 이동의 대동맥…불통 장기화시 전세계 물류대란 가능성

 

193km의 수에즈 운하가 조기에 다시 열리지 않을 경우, 아시아의 화물을 실은 선박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유럽에 가야 한다. 세계 물류업계는 대만의 에버기븐(Ever Given) 호가 수에즈 운하의 모래 벽에서 빠져 나오기를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다.

 

수에즈 운하는 세계물동량의 12%가 지나가는 세계 물류 이동의 대동맥이다. 중동에서 유럽으로 가는 기름이 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운하 불통으로 운하 북단에 64, 남단에 42척의 배가 대기하고 있다. 물류회사들은 운하당국이 곧 에버기븐호의 고착상태를 해결할 것으로 보고는 있다. 하지만 운하 막힘이 오래갈 경우 큰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운하 통제가 장기화될 경우, 전세계 선박들이 항구에서 이동하지 않고 각국 항만에 화물 적체가 심해지게 된다.

최근 백신 접종 덕분에 코로나 팬데믹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면서 세계경제가 기지개를 켜고, 물동량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국제적으로 컨테이너 부족이 심화되고, 부분적으로 공급체인망에 결손이 발생하고 있다. 이럴 때 세계 물류의 주요 혈관이 오랫동안 막힐 경우 세계경제에 애로현상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에버기븐호에 가로막힌 수에즈 운하 /위키피디아
에버기븐호에 가로막힌 수에즈 운하 /위키피디아

 

이번 대만 에버기븐호의 운하벽 충돌 사건은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이 운하는 18691117일 역사적인 개통을 했다. 이집트 정부로부터 운하 개발 특허권을 받은 프랑스인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Ferdinand Marie de Lesseps)1859425일 지중해 도시 포트 사이드(Port Said)에서 기공식을 한 지 10년 만에 완공했다.

이 운하는 강대국의 타깃이었다. 이집트가 운하로 인해 재정난에 휩싸였을 때 영국정부가 로스차일드에게서 돈을 빌려 운영권을 취득했고, 영국이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만든 것도 운하 때문이었다. 1894년 러일 전쟁 때 러시아 발틱함대는 영국의 운하통과 저지로 희망봉을 돌아 동해로 오는 동안에 기력을 잃고 일본에 패전해 동양질서 변화에 큰 영향을 줬다. 이스라엘이 중동전쟁 때 가장 먼저 공격한 것도 수에즈 운하였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려는 수로의 건설은 고대 이집트 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대 이집트 제26왕조 네카우 2(재위 BC 610~BC 595)는 지중해~홍해를 잇는 운하 건설을 최초로 시도해 완성을 눈앞에 두었다. 그러나 신탁에서 운하가 완성되면 적들이 유리하게 이용하리라고 전했기 때문에 완성 직전에 공사를 중지했다. 당시 무려 12만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현대에 만들어진 수에즈 운하와는 달리 나일강 삼각주의 제일 동쪽 끝에 흐르는 한 지류와 홍해를 연결했다. 네카우는 두 척의 배가 동시에 지날 수 있도록 넓게 판 운하로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 양쪽 바다의 함대를 통합 운영하려 했다.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이집트를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마 제국 트라야누스 황제와 이슬람 시대에도 운하가 재개통됐지만 그때마다 진흙이 덮히는 침니(沈泥) 현상이 일어나 물길이 다시 막혔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르셉이 운하를 건설해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자고 제안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계획이 실행 불가능하고 터무니 없는 것이라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영사로 근무하면서 이집트 지배층과 사귀었다. 그러던 중 무함마드 사이드(재위 1854~1863)가 이집트 총독이 되자, 르셉은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면 장차 이집트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설득했고, 총독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운하건설은 시작되었다.

총독 사이드는 르셉에게 수에즈 운하 건설을 허가했다. 르셉은 나폴레옹 3세의 황후 유제니에게 수에즈 운하건설에 필요한 기금과 재원을 조달해줄 것을 요청했다. 황후는 외교적 지원은 물론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운하건설이 무리하게 진행되면서 이집트 정부가 재정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1863년 무하마드 사이드에 이어 캐디브 이스마일이 총독이 되자 이집트의 상국(上國)인 오스만 투루크가 운하건설에 반대했다. 프랑스가 재정 보증을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18691117일 바다와 바다를 있는 세계 최대의 운하 개통식이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수에즈 운하 인공위성 사진 /위키피디아
수에즈 운하 인공위성 사진 /위키피디아

 

수에즈운하 개통으로 유럽과 아시아 간 항로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갈 때보다 절반가량 줄었다.

대운하 건설 과정에서 막대한 예산 투입으로 재정이 파산 지경에 이른 이집트 정부는 1875년에 국가 소유의 수에즈운하회사 주식 지분을 영국에 매각해, 영국이 소유하게 되었다. 고생은 프랑스와 이집트가 하고, 조용히 지켜보던 영국이 유대인 자본을 앞세워 먹은 것이다.

1952년 집권한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은 19567월 수에즈운하를 전격 국유화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제2차 중동전이 발발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저항과 미국의 개입으로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 등 3개국 군대는 철수했고 수에즈운하도 다시 이집트의 품으로 돌아갔다.

2차 중동전으로 5개월간 폐쇄됐던 수에즈 운하는 1967년 제3차 중동전 때 다시 폐쇄됐다. 그러다가 1973년 제4차 중동전을 거쳐 19756월에 통행이 재개됐다.

연간 통과 선박 수는 개통 당시인 186910척에 불과했지만 1976년에 1만 척을 돌파했다. 2014년 수에즈 운하 통과 선박은 103개 국적에 17,000여척이었다.

이곳을 통과하는 주요 화물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식량과 원재료, 공업제품이 주종이었다. 그 이후에는 석유 수송의 비중이 높아져 현재 유럽으로 수출되는 중동산 원유 대부분이 수에즈운하를 통과한다.

 

수에즈를 통과하는 한국 선박 /위키피디아
수에즈를 통과하는 한국 선박 /위키피디아

 

수에즈운하는 이집트 경제의 버팀목이다. 2014년 수에즈운하 전체 통과 수입은 53억 달러였다. 수에즈운하 통행료는 관광 수입, 해외근로자 송금에 이어 이집트에서 3번째로 큰 외화 수입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집트의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Abdul Fatah al-Sisi)2013년 제2수에즈 운하 건설을 발표하고, 1년만에 두 번째 운하를 개통했다.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지 않은 채 국내 펀드로 기금을 조성하고 80여개 국내 업체와 43,000명 이상의 노동자를 동원했다.

애초 공사 기간은 3년 정도로 예상됐으나 엘시시 대통령의 지시로 1년으로 단축됐다. 수에즈운하청은 제2 수에즈 운하 건설에 82억 달러를 투입해 전체 72km 길이의 제2 운하를 건설햇다. 그 중 35km 구간에는 기존의 운하와 나란한 새 물길을 냈다. 나머지 37km 구간은 새 물길 없이 운하의 깊이를 24m로 확대하고 폭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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