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에 쫓긴 월지, 고대인도에 쿠샨 제국 건설
흉노에 쫓긴 월지, 고대인도에 쿠샨 제국 건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3.27 14: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알렉산더 후계국 제압 후 인도 서부 차지…대승불교 중국에 전파

 

중국 고대에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匈奴)족이 중국 한족정권에 쫓겨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유럽에 이르러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원인이 되었다는 역사적 해석은 널리 알려져 있다. 흉노와 경쟁하던 또다른 세력이 있었는데, 월지(月氏 또는 月支)라는 나라다. 월지는 흉노족과 싸우다가 중국 북방에서 사라졌다. 그 월지는 어디로 갔을까.

역사연구자들에 의하면, 월지는 흉노에 쫓겨 중앙아시아로 건너갔다가 남하해 서기 1세기경 인도에 광대한 쿠샨제국(Kushan Empire)을 열어 300년 왕국을 건설했다. 쿠샨왕조는 한자로 귀상(貴霜)이라 표기되었으며, 인도의 불교를 중국에 전파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그 불교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전해 졌으니, 월지의 민족대이동이 세계역사에 준 파장은 컸다.

 

월지족의 이동/위키피디아
월지족의 이동/위키피디아

 

월지는 고대부터 중국 신장(新疆) 지역에 살았고, ()을 생산해 한족과 거래했다. 은대(殷代)의 무덤에 옥이 출토되는데, 신장 타림분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확인된다. 월지는 중국 고대기록에는 우씨(禺氏 또는 牛氏)로 기록된다. 사마천은 사기에 옥과 군마(軍馬)를 서역의 오씨(烏氏) 땅에서 사왔다고 기록했는데, 이런 나라들이 모두 월지로 파악된다.

BC 138년 한()나라의 장건(張騫)은 황제(무제)의 명을 받고 월지를 찾아 나선다. 그의 월지 방문은 한고조 유방이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에게 패해 굴욕적으로 항복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월지와 연합하려는 목적이었다.

장건이 서역에 도착했을 때엔 월지족이 흉노와 싸워 패하고 본거지인 서역(신장)을 버리고 우즈베키스탄 일대로 이동해 있었다. 당시 대월지는 흉노족과 싸울 기력을 잃은 상태였고, 개척지에 새 나라를 세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장건은 월지와의 연합전선 구축에 실패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월지는 장건이 찾아오기 수십년전에 이미 흉노 묵돌선우의 아들 노상선우(老上單于)의 공격을 받아 완패하고 멸망 직전에 있었다. 노상선우는 월지왕을 살해하고 그 해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그 술잔은 흉노 궁궐에 대대로 보관되어 후에 한나라와 맹약을 맺을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월지족은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슴에 묻고 고향을 떠나갔다. 그들은 파미르고원을 넘어 지금 카자흐스탄의 이리(伊犁, Ili) 분지로 갔다. 그곳에는 대완(大宛)이란 나라가 있었다. 대완은 월지족의 정착을 거절했다. 월지족은 그곳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아무다리아강과 아랄해 사이의 초원에 자리를 잡고 나라이름을 대월지(大月支)라고 했다.

고향에 남은 사람들은 소월지라고 불렸다. 월지족은 중앙아시아로 건너간 대월지와 남아 있는 소월지로 분리되었다.

 

간다라 미술품 (페르샤와 박물관) /위키피디아
간다라 미술품 (페르샤와 박물관) /위키피디아

 

대월지가 자리 잡은 곳은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 사이 저지대에 있는 박트리아(Bactria) 지방으로, 지금의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영토다. 대월지는 5개 부족의 연합체로 구성되었다. 중국역사서인 한서(漢書)에 다섯 부족의 이름이 나와 있는데, 휴밀(休密), 귀상(貴霜), 쌍미(雙靡), 힐돈(肸頓), 도밀(都密)이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다섯 부족 가운데 귀상 부족이 다른 네 부족을 이끌었다고 했다.

 

1세기 후반쯤 대월지는 인도 북부 천축(天竺)국을 공격했다고 후한서에 적혀 있다.

대월지에 대한 중국의 마지막 기록은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이 기록에 따르면, 대월지는 3세기경에 인도북부 고원지대를 차지했고, 나라 이름도 쿠샨이라고 했다. 월지족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 구상 부족이 다른 네 부족을 통합해 인도 북부에 자기 부족의 이름으로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대월지는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이 남긴 나라들과 충돌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BC4세기 후반에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침공했는데, 대왕이 죽은 후 중앙아시아는 그리스인들이 세운 나라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대월지가 중앙아시아에 정착했을 때 가장 강력한 적대세력은 그리스인이 통치하는 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이었다.

그리스 박트리아는 여러 유목민족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리스 지리역사학자 스트라보(Strabo)는 그리스인의 박트리아가 아시(Asii), 파시아니(Pasiani), 토카리(Tochari), 사카라울리(Sacarauli) 족의 공격을 받았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박트리아를 멸망시킨 것은 토카리였는데, 중국 기록과 그리스 기록을 종합하면, 그 토카리는 토화라(吐火羅) 일대를 지배하던 대월지로 추정된다. 이 때가 BC 124년 경이다.

대월지 또는 쿠샨은 그리스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쿠샨의 유물 가운데 동전에는 알파벳이 새겨져 있다.

 

쿠샨왕조의 동전/위키피디아
쿠샨왕조의 동전/위키피디아

 

힌두쿠시 산맥 일대에도 그리스 계열의 왕국들이 있었다. 쿠샨 왕국은 이들 나라를 제압하고 서서히 인도 지역으로 내려갔다.

쿠샨 제국이 건국한 것은 기원후(AD) 30년경으로 추정된다. 지배 영역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북인도 지역이다. 멀리는 인도 중부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카니시카 왕때의 쿠샨제국 /위키피디아
카니시카 왕때의 쿠샨제국 /위키피디아

 

쿠샨 제국의 초대 왕은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로 중국에선 구취각(丘就卻)으로 알려져 있다. 쿠줄라는 국제인이었다.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고, 인도를 지배하면서 힌두교의 시바(Shiva) 신을 따르기도 했다.

쿠샨 제국의 전성기는 카니시카(Kanishka, 재위 127~150)때였다. 카니시카왕은 중부 인도로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간다라 미술 등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했다. 대승불교도 이 때 성립되어 전파되었다.

하지만 226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란에서 발흥해 아프가니스탄을 병합하자 쿠샨왕조는 위축되었다. 이후 펀잡 지방의 소왕국으로 남아 있다가 인도에 굽타왕국이 일어서면서 변방의 소국으로 전락했다. 최종적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키다리인(Kidarites)의 공격을 받아 350년에 멸망했다.

 

현대의 강족/위키피디아
현대의 강족/위키피디아

 

그러면 신장지역에 남아 있던 소월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소월지는 칭하이(青海) 지방으로 이동해 강()족이 된다. 강족은 오호십륙국 시대(304~439)에 오호의 하나로, 족장 요장(姚萇)이 후진(後秦)을 건국한다. 후진(384417)2대로 끝나고 만다. 이후 강족은 소수종족으로 남아, 현재 쓰촨성과 티벳 고원 일대에 30여만명이 살고 있다.

월지족의 일부는 산시(山西)성으로 가서 갈()족이 되었고, 오호십륙국 시대에 후조(後趙, 319351)를 세웠다는 설이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Yuezhi

Wikipedia, Kusan Empire

Wikipedia, Qiang peopleh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