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뿌리 내린 고구려 왕자 고약광
일본에 뿌리 내린 고구려 왕자 고약광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3.29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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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직전에 사신으로 건너가 정착…高麗王이란 성씨와 칭호 부여받아

 

일본 수도 도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高)시에 고려신사(高麗神社)가 있다. 일본어 발음으로 고마신사다. 이 곳에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수 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장승 한 쌍이 우뚝 서 있다. 이 곳은 일본 나라(奈良)시대(710~794)에 고마군(高麗郡)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고마(高麗)는 고구려를 말한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이 어찌하여 일본 땅에 정착해 지명을 갖고, 절을 지었을까.

 

고마신사 입구 /위키피디아
고마신사 입구 /위키피디아

 

우리나라 사서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일본측 사료에는 고구려인들이 일본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천지(天智)천황 5(666) 1026일에 고구려 사신단이 일본에 건너 갔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멸망하기 2년전이다. 사신단의 대사는 을상(乙相) 엄추(奄鄒), 부사는 달상(達相) ()과 현무약광(玄武若光) 두 사람이었다.

이중 부사로 온 현무약광은 고구려 마지막왕인 보장왕(寶藏王)의 아들이라고 한다. 현무약광은 고구려로 귀국하지 못한다. 고구려라는 나라가 2년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고마신사 내 가옥 /위키피디아
고마신사 내 가옥 /위키피디아

 

고구려가 명운을 다하기 직전에 왜 사신을 일본에 보냈을까.

삼국사기에는 멸망 2년전인 보장왕 25(666) 임금이 태자 복남(福男)을 당나라에 파견해 황제가 지내는 태산(泰山)의 제사에 참가하게 했다는 기사가 있다. 보장왕으로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든 외교수단을 동원했음을 보여 준다. 수시로 침략해 오는 당나라에 태자를 보내 황제의 제사에 참여케 한 것은 거의 굴욕적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어찌하랴.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굴욕을 참는게 낫지 않았을까. 보장왕은 다른 아들을 일본에 보내 외교적 협조를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무약광으로 추정되는 왕자는 돌아가려 했을 때, 이미 나라는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고마신사 내의 장승 /위키피디아
고마신사 내의 장승 /위키피디아

 

그로부터 37년의 세월이 흘렀다. 속일본기(続日本紀) 대보(大寶)천황 3(703) 44일 조에 고려약광(高麗若光)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천황은 고려약광에게 왕(こにきし)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성으로 고마(高麗)를 하사한다. 고니키시는 임금을 의미하는 백제어 건길지(鞬吉支)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마고니키시(高麗王)의 지위는 종오위하(従五位下)인데, 당시 12관등을 기준으로 그다지 높지는 않다.

현무약광과 고려약광이 동일인이었을까. 이를 입증할 자료는 없지만, 부정할 자료도 없다. 따라서 두 사람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일본 천황이 보장왕의 아들에게 고려왕이라는 성과 칭호를 주고, 고구려왕으로 대우한 것이다.

 

사이타마현의 위치 /위키피디아
사이타마현의 위치 /위키피디아

 

그로부터 또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영귀(霊亀)천황 2(716)에 도카이도(東海道)7개 구니()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유민 1,799명을 한데 모아 무사시노쿠니(武蔵國国)에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고마군의 군수인 대령(大領)에 고약광(高若光)을 임명했다고 속일본기에 나온다. 고구려왕의 성씨는 고()씨다.

고약광은 만년에 흰 머리칼과 흰 수염을 길러 고마군 사람들로부터 백자상’(白髭様)으로 불렸다고 한다. ‘흰수염의 어른이란 뜻이다.

 

고마신사 내 가옥 /위키피디아
고마신사 내 가옥 /위키피디아

 

고약광과 함께 일본에 망명한 사람 가운데 승려 승낙(勝樂)이 있었다. 승낙은 승락사(勝楽寺)를 세우고 그 절에 그가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가져온 환희천(歡喜天)을 안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이타마현의 성지원승락사 /위키피디아
사이타마현의 성지원승락사 /위키피디아

 

약광은 사후 군민(郡民)들에 의해 불법을 지키는 산신으로 추대되었으며 종손이 대대로 승락사 안에 있는 사당(산신각)에서 제사를 집행했다.

고약광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다. 맏아들 高麗家重과 삼남 고마쇼운(高麗聖雲)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셋째 아들인 쇼운은 승낙의 제자로, 승낙사의 주지가 되었다. 이 승낙사가 메이지 유신 때 신불분리령에 의해 후에 성천원(聖天院)과 고마신사(高麗神社)로 분리된다.

일본 하다카시에는 아직도 고려역(高麗驛), 고려택시등의 이름으로 고구려의 숨결이 남아 있다고 한다.

 


<참고자료>

Wikipidia(일본어판), 高麗若光

Wikipidia(일본어판), 高麗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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