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왕국…금 생산지 조문국
사라진 고대왕국…금 생산지 조문국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1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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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에 위치, 벌휴 2년 185년에 신라에 병합…200여기 고분군 존재

 

한자 라고도 읽고, ‘라고도 읽힌다. 한자 사전에는 부를 소또는 대추 조로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벌휴 이사금 2(서기 185) 2,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召文國을 정벌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후세 사람들은 신라에 합병된 이 소국을 소문국이라고도 읽기도 하고, 조문국이라고도 읽는다.

삼국사기 잡지 상주조에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召文國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의성부(義城府)라는 구절이 있다.

경북 의성군에서는 조문국으로 통일해 발음하므로, 이하 조문국으로 한다. 의성에는 조문국 박물관을 세워 그 고장의 옛 나라를 추억하고 있다.

조문국(召文國)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짧은 글귀가 전부인데, 이를 통해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작은 나라로, 석씨 왕조 벌휴이사금 2(185)에 신라에 의해 정벌되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의성은 영남 북부에 위치해 있어, 조문국은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의성군 금성산고분군 1호분 경덕왕릉 /문화재청
의성군 금성산고분군 1호분 경덕왕릉 /문화재청

 

경북 의성군 금성면 학미리, 탑리리, 대미리 일원에 200여기의 고분군이 있다. 이 무덤들은 5~6세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람들은 신라에 의해 합병된 조문국의 고분군으로 파악하고 있다. 296,825에 걸쳐 분산되어 있는 고분들은 경상북도 기념물 1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곳은 삼국시대 조문국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엔 서기 185년에 멸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분이 만들어진 시기가 5~6세기라면, 이 고분군은 멸망한 조문국의 후예들의 무덤이란 얘기인가.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로 이어진다.

고분군 가운데 경덕왕릉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덕왕(景德王)은 신라 35대 임금(재위, 742765)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조문국의 마지막왕을 의미한다. 신라 경덕왕의 무덤은 경주에 있다.

의성의 경덕왕릉은 능의 둘레 74m, 높이는 8m이고, 능의 앞면에 있는 비석은 가로 42cm, 세로 22cm, 높이 160cm.

이 무덤에 관해 신비로운 전설이 내려온는데, 전설은 조선 숙종때 출간된 허미수 문집에 실려 있다.

 

의성산 금성산고분군 /문화재청
의성산 금성산고분군 /문화재청

 

먼 옛날, 한 농부가 참외를 키우기 위해 작은 언덕을 갈던 중에 괭이 밑에 사람이 드나들만한 독을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생각해 구멍에 들어가보니 돌로 쌓은 석실이 나타났는데, 석실의 둘레에는 금칠을 했고, 금소상이 있었으며, 그 머리에 금관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농부는 욕심이 나서 금관을 벗기려 했는데, 그만 손이 금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의성 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경덕왕이다. 아무 곳에 와서 살펴보고 그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하고 현몽했다. 이튿날 꿈에 말한 곳에 당도하니, 과연 굴이 있고 사람이 금소상에 붙어 있었다. 현령은 현몽이 사실임을 믿고 봉분을 높이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지방에는 대대로 또다른 얘기가 전해온다.

왕릉이 있는 땅은 500년 전에 오극겸의 참외밭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밤, 꿈에 금관을 쓰고 조복을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나는 조문국 경덕왕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무덤자리니, 속히 철거하여라라고 말하면서 한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召文王事與誰論 (조문국 임금의 일을 누구와 함께 의논하랴)

千載猶存景德墳 (천년이 지나도록 경덕왕의 무덤만 남았구나)

飛鳳曲終人不見 (비봉곡도 사라지고 사람은 불수 없으니)

召文琴去香難聞 (조문국의 거문고도 가버리고, 소리조차 들을수 없구나)

 

참외밭 주인이 놀라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의 팔에 쓰여 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오극겸은 이 사실을 현령에게 고했는데, 그때서야 팔에 새겨진 한시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후 조선 영조 원년에 이우신이 지방 유지들과 의논해 묘를 증축하고 하마비를 세우고, 사람을 써 묘를 지키도록 했다.

 

조문국박물관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조문국박물관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196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탑리리 고분을 발굴했을 때 조문국 왕관으로 보이는 금동관을 비롯해 많은 토기, 철제 등 유물이 나옸다.

당시 이 곳에 금광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때 지질조사에서 경제 인근에서는 금광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의성을 중심으로 안동, 예천, 상주 등지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옛 조문국은 찬란한 신라 황금문화의 원산지로서, 신라 김씨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지금은 매년 봄철에 향사(제향)를 지낸다고 한다.

 

의성 조문국박물관에 보관된 금동관 /조문국박물관
의성 조문국박물관에 보관된 금동관 /조문국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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