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독산성에서 느껴지는 신라 이사부 장군
오산 독산성에서 느껴지는 신라 이사부 장군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4.0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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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곳…세마대, 보적사 전설도

 

때는 6세기 중반, 신라·백제·고구려 3국은 한강 유역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540년 삼맥종(彡麥宗)이 신라 왕에 올랐으니, 진흥왕이다. 진흥왕은 등극 이듬해인 541년에 이사부(異斯夫) 장군을 병부령으로 삼았다. 지금의 국방부 장관이다. 이사부는 직급은 이찬으로 재상 격이었다.

이사부 장군이 병부령이 된 그해,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했다. 고구려의 위협에 신라와 백제가 공동 방어하자는 내용이었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를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독산산성에서 본 오산 /박차영
독산산성에서 본 오산 /박차영

 

그로부터 7년후인 진흥왕 9(548),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 왔다. 고구려의 병력은 6,000명이었다. 고구려는 예인(穢人)과 함께 독산성을 공격했다.

여기서 언급된 예인은 동해안 일대에 나라를 건설한 예국(穢人)의 병사들을 말한다. 예족은 강릉을 중심으로 부족 단위의 종족이었는데, 이사부 장군이 지증왕 시절에 실직군주와 하슬라군주를 역임할 때에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 함경남도 일대로 쫓겨나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독산성을 공격하자 백제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은 장군 주령(또는 주진)에게 갑옷을 입은 병사 3,000명을 주어 출발하게 했다. 신라군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행군해 독산성 아래 이르러 고구려병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고 쓰여 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조, 고구려본기 양원왕조, 백제본기 성왕조에 공히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고대에 삼국의 명운을 가르는 큰 전투였음을 의미한다. 이사부 장군이 병부령 때의 첫 전투로, 아마도 전투를 지휘했을 가능성이 크다.

 

성벽 /박차영
성벽 /박차영

 

삼국사기에 나오는 독산성(獨山城)은 어디일까. 오산의 독산성(禿山城)과는 발음이 같은데 한자가 다르다. (禿)은 대머리라는 뜻으로 禿山은 민둥산을 의미한다.

경기도 양주에는 독산(獨山)이 있다. 이 점에서 獨山城이 한강 이북에 있었을 것이고 추정하는 일부 역사학자도 있다.

하지만 獨山城이 한강 이북이라는 설은 합리적이지 않다. 독산성 전투 2년후에 고구려와 백제가 충청도로 비정되는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에서 뺏고 뺏기는 전투를 벌인다. 이때 두 나라의 싸움을 관망하던 신라의 이사부 장군은 양측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서 두 성을 빼앗는다.

독산성이 한수 이북에 있었다면 고구려군이 백제군 주둔지를 후방으로 두고 충청도까지 내려가 전투를 할 리가 없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獨山城은 오산의 禿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자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만 독음 자체는 변치 않았다는 것이다.

오산 독산성이 삼국의 혈투지였다는 사실은 이 곳이 삼국 모두에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백제를 공격하는 길목에 있고, 백제로서도 고구려의 공격을 막는 선봉기지였을 것이다. 신라 입장에서도 당나라와의 교역로를 열기 위해 화성당성(華城唐城)으로 치지해야 하는데, 오산의 산성은 그 중간에 있다.

 

독산산성의 전경 /네이버 지도
독산산성의 전경 /네이버 지도

 

우리는 오산의 독산성을 탐방했다. 성터로 올라가는 길은 가팔랐다. 천혜의 요새라는 것을 실감했다. 독산은 오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가 해발 208m.

축성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백제가 쌓은 성으로 추정되고,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때까지 활용되었다. 성벽 길이는 1,100m이며, 4개의 문이 남아 있다.

 

독산산성 남문 /박차영
독산산성 남문 /박차영

 

독산성은 임진왜란때 권율(權慄)이 왜적을 물리쳤던 산성으로 유명하다.

15937월에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 장군이 근왕병(勤王兵) 2만 명을 모집해 북상하다가 독산성에 주둔해 왜병 수만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켰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 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선조 35(1602)) 부사 변응성(邊應星)이 다시 보수하고, 정조 16(1792)20(1796)에도 다시 공사했다.

 

세마대 /박차영
세마대 /박차영

 

성은 좁아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결점 때문에 이 성에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남아 있다.

1593년 권율 장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끈 왜군이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위로 올려보내 조롱했다. 그러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를 산 위로 끌어올려 흰 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했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오판하고 퇴각했다고 한다. 세마대는 1957년에 복원되었다. 사적 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적사 /박차영
보적사 /박차영

 

성 내에는 보적사(寶積寺)가 있다.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다. 건립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401(아신왕 10)에 지어졌다고 한다. 절은 동문에 위치해 있다. 보적사에는 창건 전설이 전해진다. 춘궁기에 먹을 곳으로 쌀 한되 밖에 남아 있지 않던 노부부가 부처님께 쌀을 공양하고 집에 돌아 왔더니 곳같에 쌀이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적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이 절은 전통사찰 제34, 향토유적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벽 /박차영
성벽 /박차영
독산산성 서문 /박차영
독산산성 서문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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