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건릉, 봄바람에 사도세자와 정조를 생각하다
융건릉, 봄바람에 사도세자와 정조를 생각하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4.0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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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은 사도세자, 건릉은 정조의 무덤…용이 여의주를 문 형세

 

경기도 화성시의 융건릉(隆健陵)을 산책하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는 조선 국왕이 대단한 권력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이 넓은 땅을 무덤으로 만들 정도로 왕권은 대단했다. 골짜기만 해도 서넛은 되어 보인다. 농사를 지었으면 수백명을 먹여살릴 좋은 땅을 아버지의 원한을 풀고 자신이 묻히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둘째는 그 덕분에 후손들이 이 좋은 곳에 좋은 산책로를 갖게 되었구나 하는 감상이다. 왕릉의 부지였기에 누구도 손을 대지 못했고, 잘 보존되어 후대가 자연과 문화유산을 향유할수 있게 된 것이다.

 

융건릉의 지형도 /박차영
융건릉의 지형도 /박차영

 

융건릉은 융릉(隆陵)과 건릉(健陵)이란 두 개의 왕릉을 합친 합성어다. 융릉은 조선 22대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를 합장한 능이고, 건릉은 정조와 왕비와 부인 효의왕후를 모신 무덤이다. 소재지는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21(안녕동)이며, 두 왕릉 모두 1970년에 국가사적 20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왕릉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융건릉도 이에 포함된다.

 

봄비가 온 뒤 미세먼지가 없는 화창한 날씨에 융건릉 산책은 더 없이 좋았다. 나무들은 연록색 잎을 뿜어내고, 진달래, 철쭉, 귀룽나무는 저마다 색깔을 자랑하며 꽃을 활짝 피웠다. 4계절 모두 좋다지만, 그래도 봄이 제일이다.

우리는 먼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즉 융릉으로 먼저 가기로 했다. 숲길엔 소나무가 울창하다.

 

융릉 /박차영
융릉 /박차영

 

융릉은 정조가 재위시에 만들었기 때문에 건릉보다 먼저 조성되었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량포 배봉산 기슭에 있었는데, 지금의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이다. 정조는 보위에 올라 뒤주 속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蔣獻)이라 추상하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바꿨다.

그런데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이 관리를 하지 않아 흉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고 한다. 임금의 이런 마음을 눈치 빠른 신하가 재빨리 읽고 세도세자 묘소를 이전하자고 상소를 올린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사도세자의 이묘에 관해 물으니,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리 없다.

정조는 아머지 무덤 자리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충청도 양성산, 장단의 백학산, 광릉등이 거론되었지만 정조는 풍수가 좋지 않다며 퇴짜를 놓았다. 다시 추천된 곳이 경기도 화산 아래 지금의 융릉 자리다. 융릉 자리는 160년전 윤선도가 효종의 능침으로 지목한 곳이며, 길지로 알려져 있다. 정조는 그 자리에 아버지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임금에 오른지 13, 1789년의 일이다.

 

곤신지 /문화재청
곤신지 /문화재청

 

융릉의 뒷산은 화산(華山)이다. ‘꽃 화, 화산은 여러 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싼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꽃이 피어오르는 형국이라고도 했다. 정조실록(13711)에는 이곳의 형국이 반용농주형(盤龍弄珠形)이라 했다. 등천하지 못한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세란 뜻이다. 지세가 부드럽고 힘이 있다. 융릉 아래 오른쪽에 여의주 모양을 한 등근 연못을 팠으니,곤신지(坤申池). 풍수 논리로 조성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융릉과 건릉사이 숲길 /박차영
융릉과 건릉사이 숲길 /박차영

 

융릉 왼쪽으로 언덕을 두 개 넘어 정조의 무덤 건릉이 있다.

정조는 영조 28(1752)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산()이다. 이산은 7세에 세손에 책봉됐으나 10세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다. 할아버지 영조가 승하하고 1776년에 왕위에 오른다.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융릉에 모신후 자주 능행길에 올랐다. 어느날 그는 영의정 체제공(蔡濟恭)에게 "내가 죽거든 현륭원(융릉) 근처에 묻어주오"라고 부탁했다.

 

건릉의 초장지 /박차영
건릉의 초장지 /박차영

 

16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신하들은 선왕의 뜻에 따라 융릉 동쪽에 무덤을 마련했다. 1821년 정조비 효의왕후가 승하해 합장하려 했을 때, 원래의 능자리가 길지가 아니므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건릉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정조가 처음 묻혔던 초장지(初葬地)의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다가 2011~2012년에 융릉 근처에서 왕릉 규모의 봉분구역과 담장시설, 부장품이 발굴되면서 그곳이 정조가 처음 묻힌 곳임이 확인되었다.

융릉을 본 후에 건릉을 보면, 두 왕릉이 매우 유사함을 느낄수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참도가 잘 정돈되어 있고, 박석이 양 옆으로 넓게 깔린 것도 비슷하다.

 

건릉 /박차영
건릉 /박차영

 

융릉과 건릉은 역사적 의미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봄맞이 소풍길로 이 문화유산은 비길데가 없었다. 바삐 걸을 필요도 없다. 천천히 봄바람을 즐기고, 자연과 역사를 음미하면서 우리는 융건릉 둘러보기를 마무리했다.

 

건릉 홍살문과 정자각 /박차영
건릉 홍살문과 정자각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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