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노동에 동원된 스탈린 시대 정치범들
강제노동에 동원된 스탈린 시대 정치범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08 15: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련 70년⑥…굴락에 1천만명 이상 수용, 건설 현장과 광산 채굴에 동원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Naftaly Frenkel)이라는 밀수범이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의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 곳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SLON)이라 불렸는데,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gulag)이었다. [굴락(gulag)은 강제노동수용소, 쿨라크(kulak)는 반혁명 지주계급을 각각 의미한다]

소련의 반체제인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강제노역을 하면서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겐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겐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는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Genrikh Yagoda)의 손에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아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읽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고,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인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사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다.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1932년 7월 나프탈리 프렌켈(맨오른쪽)이 운하건설 사업을 감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32년 7월 나프탈리 프렌켈(맨오른쪽)이 운하건설 사업을 감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스탈린은 1927년에 제1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밀어붙였다.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지역의 광산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활용함으로써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을 것이란 계산을 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슬론 수용소를 떠맡았다.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1만명에서 193210만여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그는 슬론을 영리기업으로 활용했다. 프렌켈은 정부로부터 벌목공사와 도로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내몰았다.

 

백해~발트해 운하 /위키피디아
백해~발트해 운하 /위키피디아

 

프렌켈이 맡은 사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백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는 227km의 운하건설사업이었다.

백해(White Sea)와 발트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이 곳에 운하를 뚫어 수로를 연결하면 백해 일대를 레닌그라드(옛 페트로그라드)와 연결해 개발할수 있다는 게 스탈린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이 없었다. 게다가 난공사 지역이 많았다. 이 지역은 운하 중간에 해발 100m의 고지대가 있어 갑문을 20개 가까이 설치해야 했다. 땅을 깊이 팔수 없는 조건이었다.

공사는 스탈린의 야심적인 15개년계획 핵심사업으로 선정되었다. 1931년 설계도도 없이 공사가 착공되었다. 슬론에 갇혀 있던 수감자 10만명이 총동원되었다. 죄수들은 중장비는커녕 손작업으로 흙을 파고 날라야 했다. 다이너마이트도 사용되지 않았다. 정치범들은 도끼와 톱, 망치와 같은 저급한 도구를 지급받았다. 영하의 날씨에 얼어붙은 땅에서 작업을 하느라, 첫해 겨울에 25,000명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재소자들이 죽었다.

비밀경찰의 감시하에 공짜 노동력을 활용한 덕분에 공사는 20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마무리되었다. 날림 공사였다. 운하는 당초 깊이 22피트로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12피트로 줄였다. 대형화물선은 지나지 못하고, 바지선과 가벼운 여객선 정도가 지나가는 운하로 축소되었다.

 

백해~발트해 운하 건설에 동원된 정치범들(1932) /위키피디아
백해~발트해 운하 건설에 동원된 정치범들(1932) /위키피디아

 

19338월 운하 개통식에 스탈린이 참석이 참석하면서 유명한 작가와 예술가 120명을 동원했다. 막심 고리키, 알롁세이 톨스토이, 빅토르 쉬클롭스키, 미하일 조시첸코 등 당대의 내로라는 소비에트 작가들이 대거 불려 나왔다. 고리키가 600페이지의 책을 대표집필하면서 육체노동의 구원적 힘을 칭송했다. 혁명 전에 러시아의 문호로 유명세를 날린 작가도 볼셰비키의 선전도구에 앞장선 것이다. 고리키는 슬론 수용소에도 가서 수용소의 숭고함을 읊었다.

 

소련의 굴락 위치 /위키피디아
소련의 굴락 위치 /위키피디아

 

슬로베츠키 수용소와 같은 굴락은 1940년에 무려 53개나 있었으며, 굴락이 아니더라도 노동을 강요한 집단체가 423개나 있었다. 스탈린 집권기인 1930년에서 1953년 사이에 굴락에 보내진 수감자는 1,800만명에 이르고, 이 기간에 죽은 사람이 150~170만명에 달했다는 게 연구자들이 정부통계를 종합해 내린 결론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8년간 굴락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살아남은 작가다. 그는 수용소 생활을 글로 남겨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솔제니친은 굴락이 볼셰비키 실험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공산자의자들은 굴락이 노동을 통해 사회주의형 인간으로 개조하는 사업이라고 본 것이다.

수감자는 주로 정치범이었고, 일반 잡범도 수용되었다. 소련의 비밀경찰은 체카(Cheka)에서 GPU(192223), OGPU (192334), NKVD(193446), MVD로 이름을 바꿔가며 스탈린 체제를 반대하는 정치범을 체포해 굴락에 수용시켰다.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반발하는 지주와 소농도 굴락에 갇혀 노동교화형을 받아야 했다.

굴락의 수감자들은 운하와 도로 건설, 광산 채굴, 벌목작업에 투입되었다. 2차 대전 직전에 소련 니켈 생산의 46.5%, 아연의 76%, 코발트의 40%, 크롬 원광석의 40.5%, 금의 60%, 목재의 25.3%가 굴락의 강제노동에 의해 제공되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이들은 군수산업에 투입되었다.

 

러시아 페름의 굴락 수용소 (1943)/위키피디아
러시아 페름의 굴락 수용소 (1943)/위키피디아

 

강제 노동에 동원되지 않은 일반 노동자도 노동을 강요받았다. 스탈린은 2차 개발계획 도중인 1935년에 스타하노프 운동(Stakhanovite movement)을 벌였다. 이 운동은 알렉세이 스타하노프(Alexey Stakhanov)라는 광부의 혁명적인 노동투쟁을 사회주의적 노동의 경쟁모델로 삼자는 선전선동이었다.

스타하노프가 스스로 고안한 채탄 공정 혁신을 통해 5시간 45분 만에 석탄 102톤을 채굴했다고 1935년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는 작업 기준량이었던 1교대 시간당 6.5~7톤에 비해 14배가 넘는 양이었다. 이 보도를 접한 인민위원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는 스타하노프를 스탈린이 표방한 '새로운 인민'의 모범으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이에 프라우다지는 스타하노프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덕분에 스타하노프는 가구와 카펫, 그랜드 피아노를 갖춘 방 3개짜리 아파트와 봉급 인상, 승진의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이 영웅적 모델은 생산목표치를 채우지 못한 노동자들에겐 부당한 대우를 받는 기준이 되었다.

 

 

1928년 사흐티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린 노동자들. /위키피디아
1928년 사흐티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린 노동자들. /위키피디아

 

스탈린주의자들은 공장내에 내부고발을 적극 장려했다. 사보타지나 기계손상행위 등을 고발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었고, 그로 인해 고발당한 사람은 부르조아의 앞잡이로 비난받으며 불이익을 당했다.

1928년 코카서스 북부 샤흐티(Shakhty)란 광산촌에서 공개재판이 열렸다. 광부 53명이 옛 광산주인과 공모해 사보타지를 벌였다는 혐의로 비밀경찰 OGPU에 체포되었다. 이들중 5명은 총살당하고, 44명은 투옥되었다. 노동자들의 사보타지를 부르조아의 음모로 본 숙청작업이었고, 공개재판은 소련의 노동자들이 보라고 한 조치였다.

이렇게 밀어붙인 제1, 25개년 계획은 성공했을까. 스탈린의 의도와 달리 경제발전 프로그램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Naftaly Frenkel

Wikipedia, Solovki prison camp

Wikipedia, White SeaBaltic Canal

Wikipedia, Gulag

Wikipedia, Shakhty Trial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