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당성에서 신라의 뱃길을 보다…일몰의 명소
화성당성에서 신라의 뱃길을 보다…일몰의 명소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4.0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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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이 혈전을 치르던 곳…신라 점령후 당나라와 외교관계 연 교두보

 

서기 64311, 백제 의자왕은 신라의 당항성(党項城)을 공격했다. 당항성은 경기도 화성시 구봉산 정상에 있는 화성당성(華城唐城)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의자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으려 했다.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의자왕이 이 소식을 듣고 병사를 철수했다.”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은 고구려와 손잡고 당항성을 뺏으려 했다. 하지만 신라가 중국 당나라와 손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왕이 당항성 공격을 중단했다는 내용이다.

당항성은 삼국 통일 이전에 신라가 서해안에 확보한 교두보였다. 경상도 동쪽에 치우친 신라는 당항성을 통해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교역했다. 의자왕은 이 성을 함락시켜 신라와 당나라의 연결고리를 끊으려 했던 것이다.

 

당성 성벽 /박차영
당성 성벽 /박차영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신라를 공격했다. 당항성을 공격하기 한해 전(642)에 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군대를 주어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공격해 함락하도록 했다. 윤충은 전투에 승리한 후 김춘추의 사위 품석(品釋)과 딸을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딸과 사위를 잃은 김춘추는 고구려로 가서 도와달라고 했지만, 고구려의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은 죽령(竹嶺)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병력을 보낼수 있다고 답했다.

 

신라는 당나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의자왕이 들은 정보는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신라가 당나라에 접근한 것은 맞지만, 당 나라의 조건은 까다로웠다.

신라의 사신이 당나라에 가 황제를 알현했더니, 당 황제는 신라를 도와주겠다면서 조건을 달았다. 당 황제는 신라에 여왕이 있기 때문에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당한다면서 선덕여왕의 교체를 요구했다. 이 조건은 받아들일수 없었다. 사신은 그냥 듣기만 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신라는 고구려도 당나라도 믿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의자왕의 전략이 옳았다. 그때 백제가 당항성을 함락시켰더라면 신라가 당나라와 연락이 끊겨 당군을 끌어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자왕은 지레 겁을 먹고 공격을 중단했다. 그 때문에 백제는 17년 후에 멸망의 화를 당하게 된 게 아닐까.

 

당성 성벽길 /박차영
당성 성벽길 /박차영

 

화성당성은 오래전부터 답사하고 싶은 성이었다. 우리는 기회를 잡아 삼국이 혈전을 벌였던 옛 당항성은 찾았다.

화성당성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있는 해발 165m 구봉산(九峰山)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산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일대에선 가장 높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서쪽으로 서해바다가 보이고, 주변의 얕은 산지들이 눈아래 내려다 보인다.

성의 형태는 정상부에 테뫼식으로 만든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씬 포곡식의 외성이 결합되어 있다. 둘레는 1,200m, 성내 면적은 157,000으로 제법 큰 성이다. 국가사적 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망해루 하단부 /박차영
망해루 하단부 /박차영

 

당항성은 본래 백제의 성이었다. 서기 473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한성(서울)을 점령한 후 더 내려와 당항성까지 빼앗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고구려는 당항성 일대에 당성군(唐城郡)을 설치해 지배했다.

551년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해 백제가 한강하류 6, 신라가 한강상류 10군을 차지하면서 당항성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된다. 그것도 잠시, 신라와 백제의 동맹이 깨지고, 554년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패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신라는 이 무렵 당항성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당항성 점령은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을 차단하는 결과를 만들었고, 신라가 당나라에 조공, 즉 외교관계를 맺는 길을 열었다. 의자왕이 당항성을 공격한 것은 신라와 당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망해루 추정지 /박차영
망해루 추정지 /박차영

 

성의 정상부에는 망해루의 추정지(望海樓址)가 남아 있다. 크기는 장축 640cm, 단축 630cm의 네모꼴이다. 당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있으며, 12개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시대에 누각으로 고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망해루 남서쪽에 계단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계단으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곳에서 제사와 관련된 흙으로 만든 말(土製馬) 17개가 확인되었다.

 

성벽은 다양한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동쪽의 성벽은 거의 붕괴되었지만, 북쪽 성벽은 토성구간으로, 성벽의 기저부의 폭은 6.6m이며, 잔존하는 최고 높이는 3m로 확인되었다. 성벽의 중앙은 판축구간이며 그 기저부에는 석재를 깐 것으로 조사되었다.

 

화성당성의 위치 /네이버지도
화성당성의 위치 /네이버지도

 

화성당성은 삼국시대 이래 군사적 요충지이자, 무역과 외교의 출발지였다. 당항성 아래 항구에서 서해를 건너면 산둥(山東)반도다.

누군가는 당성을 실크로드의 출발지라고 표현했다. 실크로드는 중국 시안(西安)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후대 유럽의 학자들이 상상으로 만든 길이다. 당시 당나라는 신라와 교역하기 위해 바닷길을 건너 당항성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당항성은 시안~서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당성은 일몰의 명소다. 우리는 망해루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그날 따라 미세먼지도 없었다. 태양은 달걀 노른자처럼 조용해 바다 속으로 빠져 들었다. 태양이 진 저곳에 중국이 있을 것이다. 신라인들도 망해루에서 석양을 보았으리라.

 
망해루에서 본 일몰 /박차영
망해루에서 본 일몰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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