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폭풍에 휘말리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폭풍에 휘말리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17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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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해체②…고르바쵸프의 개혁과 개방, 공산사회에 큰 충격

 

미하일 고르바쵸프 서기장의 스타일은 전임자들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는 길을 가다가 차에서 내려 시민들과 대화를 했고, 광장에서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좋아 했다. 그는 정치국 회의에서 솔직한 대화를 하도록 유도했고, 서기장의 초상화를 내거는 것도 금지시켰다. 그는 서방의 정상들처럼 외국에 나갈 때 부인 라이사를 대동했고, 라이사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는 스스로의 권위를 내려 놓았다. 지도자의 새로운 모습에 인민대중은 호의를 보냈지만, 스탈린주의자들은 당황해 했다.

 

고르바쵸프와 부인 라이사 여사 /위키피디아
고르바쵸프와 부인 라이사 여사 /위키피디아

 

1985년에 소련 서기장이 된 그는 초기엔 급진적인 정책을 내놓지 않았다. 성급한 개혁을 내세웠간 당내 강경파들이 언제라도 자신을 끌어 내릴 것이라 걱정했다. 그는 개혁에 앞서 당내 보수파 제거에 나섰다. 정치국원을 물러나게 하고 그 자리에 개혁적인 인물로 채웠다. 그는 자신을 추천해준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국가수반으로 높여 의례적인 행사에 참석시켰다. 고르바쵸프는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을 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영입하고, 젊은 피를 공급받았다. 이렇게 해서 1년만에 브레즈네프 시대의 인물은 당 지도부에서 물러나고, 고르바쵸프는 당과 정부를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그의 권력 장악 속도는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보다 빨랐다.

 

고르바쵸프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를 주창했다. 개혁(reform)이란 의미의 페레스트로이카는 그의 독창적인 산물은 아니다.

그가 집권하기 2년전인 19834,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경제학자 타탸나 자슬라프스카야(Tatyana Zaslavskaya)는 보고서에서 의사결정의 중앙집권, 생산계획의 통제, 시장의 미성숙, 노동 자극에 대한 중앙 규제 등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보고서(Novosibirsk Report)가 페레스트로이카의 첫 신호로 간주된다.

고르비(애칭)는 레닌주의적 관점에서 페레스트로이카의 논리를 폈다. 그는 레닌이 말년에 채택한 신경제정책(NEP, New Economic Plan)에서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사회주의를 발전시킨다는 대목을 끌어들였다. 게다가 흐루쇼프의 개혁에서 집단농장에 대한 규제완화를 도입했다.

고르바초프의 초기 페레스트로이카는 시장경제가 아닌, 계획경제의 변형이었다. 그는 중앙통제를 완화하고 개별 공장과 집단농장에서 자율적으로 생산하는 모델을 구상했다. 그의 초기 시도는 실패했다. 기업의 관료집단은 부패하고 정체되었고, 집단농장이 생산력은 낙후했다. 정부의 통제를 완화하는 것만으로 경제시스템에 활력을 불어넣을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18964월 고르비는 집단농장에 생산성과 봉급을 연동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생산량의 30%를 시장에 직접 판매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레닌의 네프(NEP)를 거론하며 농업에 시장적 요소를 점차 넓혀 갔다.

 

고르바쵸프가 초기에 시도한 실패작의 하나가 금주령이다. 소련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셨다. 술은 냉대지방에서 체온을 보존하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암울한 시대를 거치며 도피의 방식이기도 했다. 과음은 직장의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사회적 범죄를 증가시켰다. 고르바쵸프는 사회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알콜 생산량을 40% 감축시켰다. 알콜 판매 연령을 18세에서 21세로 높이고 오후 2시 이전에는 술 판매를 금지시켰다. 직장과 공공장소에서의 음주를 금하고, 가정에서 술을 만들지 못하도록 했다.

알콜 제한령은 범죄율을 떨어뜨리는 긍정적 효과를 보았지만, 주류 가격이 상승하고 밀주가 성행하고, 세수가 줄어드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결국 1988년에 주류제한은 폐기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직후의 모습 /위키피디아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직후의 모습 /위키피디아

 

고르바쵸프가 글라스노스트(glasnost)를 강조한 것은 집권 2년차인 1986년이었다.

그해 체르노빌 원전폭발사고가 발생했다. 426일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제4호기에서 폭발사고가 나 수십만명의 주민을 대피시키고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를 유발했다. 사고 원인은 원자로 설계의 결함, 안전규정 위반, 운전 미숙 등으로 파악되었다. 현지 당지도부는 사고 규모를 축소하려고 했다.

고르바쵸프는 이 대재앙의 원인이 소비에트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태만한 관료주의, 조악한 작업현장, 노동자의 관성적 작업 등이 사고를 유발했다고 보고 사회에 내재한 무책임과 태만을 자각시키기 위해 글라스노스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관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에 정신적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것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치적 논쟁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계획경제에 시장주의를 도입하는 것이라면, 글라스노스트는 획일화된 정치를 개방하고 묶여 있던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푸는 것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결실은 더디게 진행되었지만, 글라스노스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다. 고르바쵸프 6년간 소련을 해체시킨 원동력은 페레스트로이카보다 글라스노스트의 바람이었다고 할수 있다. 그 스스로도 글라스노스트의 희생자가 되었다.

글라스노스트의 첫 조치는 언론에 대한 검열 완화였다. 언론에 대한 통제를 풀자 유력 언론의 편집장이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진 인물로 채워졌다. 언론들은 역사학자들을 동원해 소련의 아픈 곳을 폭로했다. 스탈린 시대의 집단 테러, 농업집단화 과정의 대기근, 1940년 폴란드 침공시의 카틴 대학살(Katyn massacre), 굴락(강제노동수용소)의 실상, 독소전쟁시의 무모한 희생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쏟아졌다. 그동안 공산당이 감추뒀던 비밀들이 폭로되면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위기감을 느꼈다.

브레즈네프 시절에 고리키로 유배를 갔던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 박사도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노벨상 수상자인 그는 단식투쟁을 하면서 체제에 저항했고, 서유럽 사회는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1986년 고르바쵸프는 글라스노스트의 일환으로 그의 모스크바 복귀를 허용했다.

종교에서도 자유가 허용되었다. 러시아정교의 부활절 예배가 처음으로 방송 전파를 탔다. 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수많은 단체와 서클이 생겨났다. 그들은 도시에서 집회를 열었고 시위에 가담했다.

 

안드레이 사하로프 /위키피디아
안드레이 사하로프 /위키피디아

 

글라스트스트는 인텔리겐챠의 지지를 받았다. 지식인들은 고르바쵸프의 원군이 되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스탈린시대의 만행이 폭로되면서 공산당 자체가 위협을 받았고, 공산당 서기장인 고르바쵸프에 대한 불신도 커졌다.

고르바쵸프는 양면에서 공격을 받았다. 급진파들은 보다 폭넓은 개방을 요구한 반면에 보수파들은 지나친 개방이 가져오는 혼란을 우려했다.

급진파의 대표가 사하로프와 옐친이었다. 사하로프는 자택에 복귀한 이후에 정치에 뛰어들어 고르비 정권의 개방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사하로프는 최초로 독자적 정당을 설립하고, 미국을 방문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198912월에 68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옐친은 레닌주의 유산도 포기할 것을 요구하며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으로 전환하고 다당제 선거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고르바쵸프는 옐친을 철없는 정치가라고 비난했다. 옐친은 당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정치국에서 사퇴하고 민중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보수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니나 안드레야바(Nina Andreyeva)라는 교사는 잡지에 실은 글에서 고르바쵸프의 개혁을 스탈린 시대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비판했다. 이 글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외국에 나가 있던 고르바쵸프는 귀국후 정치국 회의를 열어 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프라우다지에 자신의 반박 글을 실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Mikhail Gorbachev

Wikipedia, Andrei Sakharov

Wikipedia, Chernobyl dis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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