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키아 해적…로마시대 노예무역으로 활개
킬리키아 해적…로마시대 노예무역으로 활개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16 1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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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한때 포로로 잡히기도…폼페이우스에 의해 소탕

 

터키 남쪽해안에 시실리아(Cilicia)라는 지역이 있다. 이 지역은 로마 시대에 킬리키아(Kilikia)라고 불렀다. 해안에는 후미진 곳이 많고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스, 로마를 잇는 해상교역로가 킬리키아 앞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이 지역은 해적들의 소굴로, 로마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속주에서 생산된 식량을 배에 싣고 오다가 해적에게 털려 로마 시민들이 식량난에 허덕이기도 했다.

이들의 주업은 노예 무역이었다. 해적들은 해안을 기습 공격해 사람을 잡아 노예를 팔았다. 그 노예를 사는 사람들은 로마의 농장주였다. 해적들은 로마의 적이었지만, 사실상 로마의 농업시스템과 연결되어 기생하는 조직이었다. 전성기에 로마에는 하루에 10만명의 노예가 거래되었다고 하니, 해적들에게는 좋은 시장이 열려 있는 셈이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BC 1세기경의 킬리키아 해적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그들은 배를 습격할 뿐 아니라 여러 섬과 연안 도시들까지 약탈했다. …… 해적선의 수가 1,000척이 넘었고, 이들이 약탈한 도시는 400여곳에 달한다. 그들은 신전마저 습격해 파괴했다.”

BC 73년 노예반란이 일어났을 때, 두목 스파르타쿠스(Spartacus)는 킬리키아 해적들에게 무기를 거래하자고 했다. 해적들은 배신을 때렸다. 그들에게 의리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해적들은 무기를 잔뜩 싣고 와 황금으로 값을 받은 후 반란자들을 체포해 다시 노예로 팔아버렸다.

 

킬리키아 지방 /위키피디아
킬리키아 지방 /위키피디아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킬리키아 해적에게 붙잡힌 스토리가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전해온다.

카이사르가 젊은 시절에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 유학하러 가다가 킬리키아 해적들에게 붙잡했다. 해적들은 몸값으로 20탈렌트를 요구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따르면 20탈렌트는 병사 4,300명의 1년치 봉급에 해당한다.

이 거액의 몸값을 요구받고도 카이스르는 배짱을 부렸다. 그는 네 놈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군하면서 스스로 몸값을 50탈렌트로 올렸다. 청년 카이사르가 담대하기도 했지만, 자기과시욕도 있었던 것 같다.

카이사르는 하인에게 로마에 돌아가서 몸값을 마련해 오라고 하면서 해적소굴에서 그들과 함게 살았다. 그는 해적들에게 거만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자려고 하는데 해적들이 떠들면 조용히 하라고 명령하고, 해적들이 무슬훈련이나 오락을 할 경우 함께 놀면서 기량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해적들이 건방지게 굴면, “네놈들을 죽여버리겠다고 오히려 위협했다고 한다.

하인이 돈을 마련해 오자 그는 38일만에 풀려 났다. 하지만 그는 바로 로마로 돌아가거나 로도스 섬으로 공부하러 가지 않고 근처 밀레투스에 가서 배를 빌리고 선원을 모집했다. 카이사르는 해적선을 찾아 다니며 자신을 포로로 만든 해적들을 사로 잡았다. 물론 그가 지불한 50탈렌트도 찾았을 것이다. 그는 그 해적들을 모두 교수형에 처했다. 포로생활을 할 때 말한 것이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킬리키아 해적은 카이사르와 함께 3두정치를 이끈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에 의해 소탕된다.

소아시아 해안에 근거지를 둔 해적들이 이탈리아 반도까지 출몰하면서 로마시민들의 걱정이 켰다. 게다가 식량 운반선을 약탈해 로마에 식량이 부족해지는 일도 있었다.

BC 6739세의 폼페이우스는 해적 소탕을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줄 것을 우려해 반대했지만, 민회에서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었다.

총사령관에 폼페이우스를 임명하고, 12만명의 중무장 보병과 군선 500, 기병 5,0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이 출동했다.

폼페이우스는 지중해를 13개 권역으로 나누고 서부부터 장악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동부의 킬리키아의 해적 소굴을 공격했다. 해적 소탕에 소요된 기간은 89일이었다. 단시간에 해적무리를 소탕한 것이다. 이때 목숨을 잃은 해적이 1만명 이상이고, 포로로 잡힌 해적이 2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항복한 해적들은 내륙 깊은 곳에 땅을 나눠주고 이주시켰다. 해적질을 하지 못하게 바다와 격리시킨 것이다.

이때부터 지중해는 로마의 바다가 되었다.

 

킬리키아 해적들의 근거지였던 코라카이시움(터키 코라케시온) 해안 /위키피디아
킬리키아 해적들의 근거지였던 코라카이시움(터키 코라케시온) 해안 /위키피디아

 

킬리키아 해적들 가운데 일부는 폼페이우스의 병사가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의 전투에서 패해 BC 48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암살되자, 그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Sextus Pompeius)가 아버지의 병력을 이어받아 카이사르에 대항했다. 섹스투스는 아프리카로 건너가 결사항전을 부르짖다 패하고,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카이사르가 죽고 그의 후계자이자 로마 초대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도 섹스투스는 저항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과거의 킬리키아 해적들에게 해적질을 시켰다. 지중해에서 로마의 곡물수송선을 습격해 로마를 혼란에 빠뜨려 민심이반을 책동한 것이다. 섹스투스의 활동은 성공을 거두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에게 코르시카와 사르데냐의 통치권을 양보하며 타협을 모색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섹스투사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를 장악한 섹스투스를 공격했고, BC 36년에 섹스투스와 그의 수하 옛 해적들을 괴멸시켰다. 섹스투스는 BC 35년 킬리키아 근처인 소아시아 밀레투스로 도망했다가 잡혀 재판 없이 처형당했다.

그 이후 로마시대에 지중해에서 해적은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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