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냉전 종식…헝가리에서 ‘철의 장막’ 뚫리다
동서냉전 종식…헝가리에서 ‘철의 장막’ 뚫리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1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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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해체③…국제유가 하락에 소련 군축제의, 동유럽에도 긴장완화 바람

 

1960년대에 소련의 1인당 GDP는 일본과 대등할 정도로 향상되었다. 소련은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nik)를 쏘아 올리고 우주경쟁과 핵무기 경쟁에서 미국을 앞섰다. 소련은 공산주의 경제가 자본주의에 비해 우월하다고 자부했다. 1970년대 브레즈네프 시기에 소련은 절정기에 달한 듯 싶었다. 석유, 천연가스, 수력, 원자력 등 에너지 부문에서 소련은 세계 21%를 차지, 미국(20%)을 앞섰다.

하지만 소련의 일시적 우위는 유가 고공행진에 가려진 신기루였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소련의 경제는 기력을 잃었다. 그 원인 중의 하나가 국제유가의 폭락이었다. 국제유가는 1980년대 중반에 3분의1로 하락했다. 그동안 잘 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소련 경제의 모순이 갑자기 드러났다. 소련인들의 1인당 GDP가 급락하고, 수입에 의존하던 생활필수품이 부족하게 되었다. 전형적인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 생겨난 것이다.

소련은 197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에 버금가는 최고의 산유국이었다. 시베리아 중부 사모틀로르(Samotlor)에서 신유전이 발견되면서 기름생산이 급증했고, 서방국가들이 오일쇼크로 허덕일 때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국제적으로 기름이 과잉생산되면서 국제유가가 폭락하자,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소련은 중동 산유국이나 베네수엘라와 달리 석유 이외의 산업이 광범위했지만 유가하락에 큰 타격을 입었다. 국영석유회사에서 걷는 세수가 전체 세수의 40% 정도를 차지해 심각한 재정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1987년 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랜)의 한 인사는 사모틀로르 유전이 없었다면, 페레스트로이카는 10~15년 먼저 추진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름값 하락으로 인한 경제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음을 시인한 것이다.

 

국제유가 추이 /위키피디아
국제유가 추이 /위키피디아

 

1985년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서기장이 되었을 때, 소련의 재정은 취약했다. 군비 부담이 무거워 졌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스타워스라 불리는 전략방위계획(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추진하며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부추겼다.

고르바쵸프에겐 군비를 줄여 그 여력을 경제부문에 투입하고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사용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고르바쵸프는 경제 분야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고, 사회 각부문에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도입했다. 글라스노스트는 인민들에게 자유를 허용했고, 그 바람에 공산정권의 권력남용과 과거의 죄악이 폭로되었다. 또한 소련인들은 서방의 문화에 접근하게 되었고, 서방진영과의 대립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논리에 접근했다.

 

1989년 12월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소련 미하일 고르바쵸프 서기장이 지중해 몰타에서 역사적은 냉전종식 회담을 열고 있다. /위키피디아
1989년 12월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소련 미하일 고르바쵸프 서기장이 지중해 몰타에서 역사적은 냉전종식 회담을 열고 있다. /위키피디아

 

동서냉전의 화해는 고르바쵸프의 제의로 시작되었다. 흐루쇼프 시절에 평화공존론을 제기하며 자본주의 진영과 데탕트를 추진했지만 브레즈네프 시기에 보수주의로 회귀하는 바람에 동과 서의 두 진영은 다시 대립국면으로 돌아섰다. 고르비(애칭)는 흐루쇼프 시절로 다시 돌아갈 것을 희망했다.

고르비는 미국에 핵군축을 제기했도, 레이건도 이에 호응했다. 198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첫 정상회담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두 정상은 양국이 핵무기를 50%씩 각각 감축하는 내용에 합의를 보았다. 두 번째 회담은 이듬해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렸는데, 고르바쵸프는 미국의 SDI 정책의 폐기를 요구했다. 핵방어를 위해 우주전쟁으로 치달을 경우 소련은 재정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레이건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협상은 논란을 겪다가 1987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3차 회담에서 미소 양국은 중거리 핵무기감축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에 합의했다.

이어 고르바쵸프는 1989년 소련판 베트남으로 불리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고, 그해 12월 지중해 몰타섬에서 3일 미국의 조지 W.H. 부시와 냉전종식을 위한 역사적인 조약에 서명했다.

 

‘철의 장막’ 위치 /위키피디아
‘철의 장막’ 위치 /위키피디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cold war)이 시작되자, 소련은 서유럽과 동유럽의 경계에 7,000km에 이르는 긴 철조망을 설치했다. 그 중 일부가 베를린 장벽이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이를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고 불렀다. 철의 장막 부근에는 감시초소와 지뢰가 묻혀 있었고, 공산진영은 군대를 주둔시키며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에 대해 삼엄한 경계를 폈다. 독일에서는 한 마을이 철조망으로 갈라졌고, 동족 사이에 전화교환도 끊어졌다.

고르바쵸프가 이끈 화해의 바람은 철의 장막에도 불어왔다.

1987612,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에서 연설했다. “고르바쵸프 서기장, 당신이 평화를 추구한다면, 당신이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추구한다면, 당신이 해방을 추구한다면, 여기 이 문에 와서 보시오. 이 문을 여시오. 그리고 이 담장을 헐어 버리시오.”

그러나 이 문이 열리기까지는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 /위키피디아
오토 폰 합스부르크 /위키피디아

 

19892, 헝가리의 미클로시 네메트(Miklós Németh) 총리가 고르바쵸프에게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설치된 일부 철조망을 허물겠다고 보고하고, 그의 의향을 떠보았다. 헝가리는 공산권, 이웃 오스트리아는 서방진영이었다. 그때 고르바쵸프는 “1956년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란 답변을 주었다. 1956년에 헝가리에서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자 소련은 군대를 보내 시위대를 진압한 적이 있었다. 헝가리는 소련의 허가를 얻어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가 만나는 라이카(Rajka)라는 국경마을의 철조망을 철거했다. 이는 최초의 철의 장막철거로 기록된다. 하지만 철조망만 제거되었을 뿐 실질적인 인적 왕래는 허용되지 않았고, 형식적인 쇼에 그쳤을 뿐이다.

철의 장막에 작은 구멍이 생긴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 오토에 의해 이뤄졌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Otto von Habsburg)1차 대전 패전으로 폐위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맏아들이다.

오토는 당시 범유럽연맹(Paneuropean Union)이란 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1989620일 오토는 데브레첸 대학에서 유럽 내에 국경을 없애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강연에 헝가리 민주포럼 소속 정당인들이 참석했다. 강연후 저녁자리에서 민주포럼 소속 사람들이 오토에게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경 근처에서 두 나라 사람들이 만나 피크닉([picnic]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다. 오토는 좋은 의견이라며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 제안은 네메트 총리에게로 보고되었다. 네메트 총리는 국경 한곳에 철조망을 헐긴 했지만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인적 왕래는 금하고 있던 차였다. 총리는 3시간에 한해 국경을 개방하는 조건으로 두 나라 사람들의 피크닉을 허용했다.

장소는 국경도시 소프론(Sopron)이고, 일시는 819일로 예정되었다. 헝가리에선 민주포럼 당원들이, 오스트리아에선 범유럽연맹회원들이 참가자들을 모집했다. 이 소식이 헝가리에 밀입국해 있던 동독인들에게도 알려졌다.

819일 오후 3,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정부는 두 나라 국경검문소의 문을 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틈에 동독인 20~30명이 검문소를 통과해 오스트리아 쪽으로 빠져나갔다.

네메트 총리는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집무실에서 종일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 대사관 사람이 문을 두드리거나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헝가리 정부는 그후 소프론 검문소를 개방하고, 동독인의 국경 통과를 허용했다. 베를린 장벽이 닫혀 있던 시기에 동독인에겐 서독으로 넘어가는 작은 구멍을 발견한 것이다. 이후 동독인 3만명이 헝가리 루트를 통해 서독과 서유럽으로 이주했다.

철의 장막을 허물고 독일 통일의 문을 연 이 시건을 범유럽 피크닉’(Pan-European Picnic)이라 부른다.

 

헝가리 소프론의 범유럽 피크닉 기념비 /위키피디아
헝가리 소프론의 범유럽 피크닉 기념비 /위키피디아

 


<참고자료>

CarnegieEndowment, The Formation and Evolution of the Soviet Union’s Oil and Gas Dependence

Wikipedia, Cold War

Wikipedia, iron curtain

Wikipedia, Pan-European Pic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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