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3국, 노래혁명으로 소련에서 독립하다
발트 3국, 노래혁명으로 소련에서 독립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2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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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해체⑤…증오와 보복 대신에 노래와 인간띠 잇기로 자유 쟁취

 

소련은 100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 연합체였다. 연방은 15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었고, 공화국 내에도 민족별 자치공화국 또는 자치주를 두었다. 러시아인이 50% 이상을 차지했고, 우크라이나, 벨라루시의 슬라브계를 합치면 70%를 넘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민족주의를 구질서의 산물로 보고,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이 이를 녹여낼 것으로 믿었고, 그런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민족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수민족을 강제로 이동시키면서 민족주의가 고양되는 것을 억제했다.

소련 체제가 막강했을 때엔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민족운동가는 굴락(강제노동수용소)에 가둬버렸다. 하지만 미하일 고르바쵸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은 이런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민족주의자들은 소련제국이 과거 자기민족에 대해 저지른 만행을 들춰내고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고조시켰다. 특히 동유럽의 국가들이 소비에트 체제를 거부하고 민주 정부를 수립한 것이 소련내 공화국들의 민족주의를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

 

발트 3국 /위키피디아
발트 3국 /위키피디아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가장 먼저 민족운동을 벌인 공화국은 발트 3국이다.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로 구성된 발트 3국은 대체로 비숫한 역사 과정을 거쳤다.

3국은 중세 이후 독일, 덴마크,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왔다. 13세기초 덴마크가 에스토니아 북부 지역에 진출해 탈린(Tallinn)을 건설하고 일대를 장악했다. 이어 독일 주교단과 기사단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16세기 중반까지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엔 덴마크와 폴란드에 분할되었다가 다시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1710년 러시아 피오트르(Piotr) 대제가 발트해에 항구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지역을 합병한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 발트 3국은 독립을 하는데, 그것도 잠시였다. 1939년 독소 협정으로 다시 소련 땅이 되어 소련의 3개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소련의 지배 시절에 발트 사람들은 핀란드 TV를 시청하면서 종 와 사상의 자유를 인식하게 되고, 소련체제에 대한 저항감을 키웠다.

 

라트비아 리가의 자유기념비 /위키피디아
라트비아 리가의 자유기념비 /위키피디아

 

발트 국가의 민족운동은 자그마한 불씨에서 시작되었다.

19867, 라트비아의 조그마한 항구도시 리예파야(Liepāja)에서 노동자 3명이 헬싱키 협정을 지지하며 헬싱키-86’(Helsinki-86)이란 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소련에 반대하는 최초의 반공조직으로 기록된다.

헬싱키 협정은 1975년 미국, 소련 등 35개국이 참여해 동서긴장 완화를 추구한 조약으로, 인권과 기본권 보장, 민족자결권 존중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브레즈네프 시절에 소련은 이 거창한 조약에 서명을 한 후 지키지 않고 있었다.

헬싱키-86’의 구성원은 20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라트비아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19861226일 라트비아 청년 300명이 수도 리가의 성당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레닌 거리를 지나 소련 점령기에 저항하다 숨진 사람들을 기리는 자유기념비에 헌화한 후 소비에트 러시아는 가라. 라트비아에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이듬해 6헬싱키-86’이 이끄는 시위에 5,000명의 군중이 참가해 민족 가요를 부르며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을 성토했다. 라트비아 당국은 처음엔 이 시위를 저지하지 않았다. 시위대가 점점 더 불어나자 198711월 소련의 지시를 받은 라트비아 지방 당국은 시위대를 저지했다.

 

발트 3국의 독립운동은 노래혁명(Singing Revolution)이라 한다.

발트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에스토니아에서는 유서깊은 노래 축제를 매년 열어왔다. 이 잔치에는 전국의 에스토니아인은 물론 이웃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참여하고, 해외동포들도 찾아와 1주일간 노래의 향연을 벌였다. 1869년 에스토니아 타르투(Tartu)에서 시작된 축제는 민속의상을 입고 민요와 합창곡을 부르며 국가 화합을 도모하는 행사로 진행되었다.

2차 대전 기간에 발트인은 독일에 점령되어 5,000명 이상이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독일과 소련의 전쟁터가 되어 산업의 45%, 철도의 40%가 파괴되고, 20만여 명이 희생되는 손실을 입었다. 소련 공군의 공습으로 에스토니아 탈린 주거지의 약 30% 이상이 파괴되었다.

이 슬픈 운명을 겪은 민족들은 노래로 상처를 달랬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노래 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소련의 탄압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그들은 폭력이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로 대응했다.

 

에스토니아의 독립운동을 격화시킨 사건은 19872월 소련 정부가 인광석을 발굴하려는 계획이 밝혀지면서부터다. 이 계획은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MRP-AEG그룹이라는 단체가 소련의 계획을 공개하고 비난했다.

이 무렵 알로 마티센(Alo Mattiisen)이라는 음악가는 다섯곡의 애국 노래를 작곡해 19885월 타르투 민속음악제에 내놓았다. 그해 6월 탈린에서 열린 노래 축제가 끝난후 참가자들은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독립 열기를 뿜어 냈다. 이 노래는 에스토니아는 물론 이웃 발트 국가에 퍼져나갔다.

 

에스토니아의 노래축제 /위키피디아
에스토니아의 노래축제 /위키피디아

 

1989823일에는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지나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에 이르는 600의 길에 약 200만 명이 거대한 인간띠를 형성했다. 발트 3국인들은 국기를 흔들며 국가를 부르고, 자유의 열망을 외쳤다. 이는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로 기록되었다.

에스토니아 민중의 노래 부르기와 인간띠 잇기 운동에 힘입어 1991년 에스토니아 소비에트(의회)는 독립을 요구했다. 노래혁명은 다양한 시위와 저항운동으로 4년 동안 지속되었다.

 

1989년 발트 3국의 인간 띠잇기 운동 /위키피디아
1989년 발트 3국의 인간 띠잇기 운동 /위키피디아

 

1991년에 소련군 탱크가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에스토니아로 밀고 들어가려 할 때, 에스토니아 의회는 독립을 요구하며 소련 법률을 거부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소련 탱크를 저지하기 위해 인간방패를 형성하며 방송국을 둘러쌌다. 소련 탱크는 더 이상 에스토니아를 진입하지 못했다.

1991820일 저녁 늦은 시각, 에스토니아의 정당들은 협의를 거쳐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군은 TV 방송탑을 포격하려 했다. 소련에서 고르바쵸프를 실각시키려는 쿠데타가 발생했고, 쿠데타 세력이 에스토니아의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포격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소련의 쿠데타가 옐친의 민주회 사위로 인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에스토니아는 참화를 비껴나게 되었다.

 

대부분의 혁명은 증오를 기반으로 한다. 증오는 보복을 부른다. 살인과 방화, 그리고 극단으로 치달은 증오는 반혁명을 불러일으켜 전쟁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발트 3국은 희망을 노래하며 평화적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에스토니아는 1991820, 라트비아는 다음날인 21, 리투아니아는 96일 각각 독립한다.

발트 3국의 독립선언은 다른 소련 공화국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로부터 4개월후인 199112월말, 소련은 해체를 선언한다.

 


<참고자료>

Wikipedia,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Wikipedia, Helsinki-86

Wikipedia, Singing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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