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통치 시기에 핀란드 민족주의 고양
러시아 통치 시기에 핀란드 민족주의 고양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23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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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역사②…언어와 문학, 음악 통해 민족의식 자각, 차르 통치에 반발

 

1808~1809년에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이번 전쟁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러시아가 프랑스에 굴복해 대륙봉쇄령을 준수하고 있었고, 스웨덴이 영국의 편을 들면서 일어났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1807년 나폴레옹과 맺은 틸지트 조약(Treaty of Tilsit)에 따라 스웨덴의 구스타브 4세 국왕에게 대륙봉쇄령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면서 일어났다. 스웨덴 국왕은 영국의 덴마크 공격에 가담해 땅덩어리를 얻어보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알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이 나폴레옹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웨덴령 핀란드를 공격했다. 1년여에 걸친 핀란드 전쟁(Finnish War)에서 러시아는 핀란드를 점령했다.

 

핀란드 전쟁 /위키피디아
핀란드 전쟁 /위키피디아

 

핀란드인들은 전쟁의 결과로 통치자만 바뀌었을 뿐, 독립이 얻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핀란드인들은 러시아에 반감을 품었고, 게릴라전과 농민 폭동을 통해 러시아에 저항했다. 러시아는 핀족의 반란을 물리적으로 진압했다. 러시아군 사령관은 핀란드인에게 충성을 요구했다. 다만 러시아는 핀란드에 루터파 종교를 허용하고, 의회도 유지하고, 사유재산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18099월 스웨덴은 패전을 인정하고 핀란드를 러시아에 이양했다. 핀란드인들은 더 이상 저항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4신분(성직자, 귀족, 농민, 부르죠아) 의회를 열어 러시아에 복속을 결의했다. 이때부터 1917년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108년간 핀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러시아는 핀란드를 대공국(Grand Duchy)으로 편제했다. 러시아 차르가 핀란드 대공을 겸임하고, 러시아인 총독을 파견했다. 핀란드 대공국은 러시아 제국과는 별도의 국가이지만, 군주가 동일한 연합국가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1820년대 헬싱키 중심가 /위키피디아
1820년대 헬싱키 중심가 /위키피디아

 

러시아 치하에서 핀란드는 스웨덴 지배 시절보다 폭넓은 자율권을 획득했다. 농민들은 지주에 얽매인 러시아 농노와 달리 스웨덴 시절에 보장된 신분적 자유를 누렸다. 또 핀란드인은 러시아의 전쟁에 징집되지 않았다. 1860년대엔 4신분 의회가 다시 소집되어 자치에 필요한 입법을 할수 있었다. 남부지방에 러시아 정교가 들어와 있었지만, 다수의 핀란드인들이 신봉하는 루터파 교회의 개종을 요구하지 않았다. 또 스웨덴 시대의 법률과 사법, 사회 제도를 그대로 계속할 수 있게 했다.

러시아가 핀란드에 유화적 입장을 취한 것은 스웨덴 치하에서 러시아보다 선진적 제도를 유지했고, 성급한 러시아화를 취하면 스웨덴으로 돌아가려는 여론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차르 알렉산드르는 여기에 선물 하나를 더 얹어 주었다. 그동안 스웨덴과 전쟁에서 뺏아 러시아 영토로 만든 카렐리아(Karelia)를 핀란드 영토로 넘겨주었다. 차르의 입장에선 자신이 러시아 군주이자 핀란드 군주이므로 영토변경은 이쪽 손에서 저쪽 손으로 넘기는 것에 불과했지만, 오히려 러시아 귀족들이 이에 반발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1세는 수도를 투르크에서 보다 접근성이 좋은 헬싱키로 옮겼다. 러시아는 헬싱키에 대성당을 지어줬는데, 지금도 핀란드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핀란드 대공국 시기에 산업 투자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핀란드 자치정부는 산업을 자유화하고 항구의 인프라를 확대했다. 철도와 전신망도 깔렸다. 내수 시장은 작았지만 수출을 통해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목재산업, 광산업, 기계 산업의 기초가 형성되엇다. 핀란드의 유명한 기업 노키아(Nokia)가 펄프산업에서 처음 일어난 것은 1871년이었다.

 

두 개 머리를 가진 러시아 독수리가 핀란드 여인이 들고 있는 법전을 찟어버리는 그림(Edvard Isto, 1899) /위키피디아
두 개 머리를 가진 러시아 독수리가 핀란드 여인이 들고 있는 법전을 찟어버리는 그림(Edvard Isto, 1899) /위키피디아

 

러시아 지배 하에서 핀란드 민족주의 운동은 더 고양되었다. 600여년 동안 핀란드를 지배한 스웨덴의 언어와 관습, 문화를 벗어 던지고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귀족층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민속학자 엘리아스 뢴로트(Elias Lönnrot)는 핀란드 전승가요를 채집해 칼레발라’(Kalevala)를 발간했다. 칼레발라는 핀란드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스웨덴어는 핀란드 사회 중상류층에서 사용되었고, 관공서와 상업의 공용어였다. 85%의 농민들이 핀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핀란드인들은 핀어 사용을 통해 스웨덴인과 다르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언어는 민족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켰다. 핀어 사용운동은 정치적으로 페노만 운동(Fennoman movement)으로 발전해 반러시아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다. 1863년에 핀어는 관공서에서 사용하는 공용어의 하나가 되었고, 1892년에는 스웨덴어와 동등한 지위로 격상되었다.

핀란드 민족주의에 기여한 또다른 인물이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시벨리우스가 1899년에 작곡한 핀란디아’(Finlandia)는 러시아로부터 독립할 때 핀란드인을 단결시키는 구심점의 역할을 했다.

 

핀란드는 크림 전쟁(1853~1856) 때에 영국과 프랑스, 스웨덴의 연합함대로부터 포격을 받기도 했다. 러시아는 핀어로 된 언론의 출판을 금지하고 러시아어로만 표현하도록 했다. 핀란드인의 다수가 러시아를 몰랐기 때문에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몰랐다. 하는수 없이 러시아는 언론의 핀어 사용을 풀어주었다. 크림 전쟁 시기에 핀란드 지식인들은 러시아 정부의 감시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핀란드 총독 보브리코프가 핀란드인에 의해 저격당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핀란드 총독 보브리코프가 핀란드인에 의해 저격당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러시아는 지배 말기에 핀족 문화를 말살하고 러시아풍으로 뜯어고치려 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는 핀란드 대공의 지위보다는 러시아 차르로서 핀란드의 러시아화를 시도했다. 1899년 러시아는 핀란드 의회의 동의 없이도 법령을 제정할수 있다록 했고, 1900년엔 러시아어롤 공용어로 사용토록 강요했다. 1901년에는 핀란드군을 제국군에 편입시키고, 훈련병을 러시아 훈련소에 입소시키도록 했다.

판란드인들은 러시아의 제국화에 크게 반발했다. 미침내 1904년에 러시아인 총독 니콜라이 보브리코프(Nikolay Bobrikov)가 핀란드 청년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러시아로부터 독립은 우연하게 다가왔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터지면서 핀란드는 독립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Finnish War

Wikipedia, History of Finland

Wikipedia, Grand Duchy of Fin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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