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군사력 아닌, 자유의 바람에 무너졌다
소련은 군사력 아닌, 자유의 바람에 무너졌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2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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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해체⑧…1991년 쿠데타 실패후 각 공화국 독립, CIS로 대체

 

소련은 인류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었다. 그 제국의 지배범위는 로마제국, 몽골제국, 대영제국보다 넓었고, 강력했다. 2차 대전 직후인 1960년대에 소비에트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인구대국인 중국를 집어삼키더니, 인도차이나, 북한을 향해 질주했고, 아프리카에선 대영제국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제국은 갑작스럽게 무너졌다. 그 붉은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원자폭탄이나 첨단무기가 아니었다. 바로 민주화라는 온풍이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 즉 자유였다. 공산주의는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이유로 개인 자유를 말살했고, 그 탄압은 물리적 힘을 바탕으로 했다. 제국의 정점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시기였다. 스탈린은 거대한 빅브라더 체제를 형성하며 지구의 절반을 통제하고 나머지 세계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견고하던 소비에트 제국에 균열이 발생했다. 1950~60년대에 중소분쟁,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자유화바람이 불더니만, 1980년대 중반 이후 5년만에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미하일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의 골자는 자유화였다. 시장의 자유, 사상과 출판, 정치적 자유가 소련 제국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소비에트 제국을 무너뜨리는데 미국의 강력한 핵무기가 동원되지 않았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언급한 이 악의 제국’(Evil Empire)을 무너뜨린 힘은 바로 민주주의였다. 소비에트의 붕괴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거대한 사상적 조류의 퇴조이기도 했다.

 

소련과 위성국, 영향력이 미친 범위 /위키피디아
소련과 위성국, 영향력이 미친 범위 /위키피디아

 

소비에트 제국 해체의 마지막 저항자는 그 제국을 뿌리부터 흔든 고르바쵸프 그 자신이었다.

1991818, 쿠데타 음모자들은 고르바쵸프 당서기장이 휴가를 보내고 있는 크림반도에 대표를 보내 비상사태 선포에 서명하라고 압박했다. 고르바쵸프는 거부하고 가택연금 상태에 처했다.

다음날인 819일 오전 7, 소련공산당 8인방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가비상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8인방은 소련 부통령 게나디 야나예프, 총리 발렌틴 파블로프, KGB 총책 블라디미르 크루치코프,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 공산당 중앙위원 올레그 바클라노프, 농민연맹의장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상공회의소 의장 알렉산드르 티쟈코프였다. 고르바쵸프를 빼고 연방정부의 수뇌부가 대거 참여한 것이다.

대외적 총책은 부통령 야나예프로 보여졌다. 이들은 일단 공산당 기관지를 제외하고 모스크바의 신문발행을 중지시키고,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라디오방송의 전파 송출을 금지시켰다. 쿠데타 세력은 타만스카야 사단(Tamanskaya Division)과 탱크사단, 공수부대를 동원했다. 4,000명의 병력, 350대의 탱크, 300대의 장갑차, 420대의 트럭이 모스크바에 진입했다.

음모자들은 고르바쵸프의 억류에는 성공했지만,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체포에는 실패했다.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와 별장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옐친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곳에 없었다. 옐친은 쿠데타 소식을 듣고 러시아의회 청사인 백악관(White House)으로 향했다.

그날 오전 9, 옐친은 백악관에서 국가비상위원회를 비난하며 군부에 쿠데타에 동조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옐친의 선언은 전단으로 인쇄되어 모스크바 시내에 대량으로 뿌려졌다. 그날 오후 모스크바 시민들은 백악관으로 몰려와 인()의 장막을 쳤다.

군부는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파와 옐친을 지지하는 파로 갈렸다. 백악관을 포위한 타만스카야 사단 소속 탱크대대의 지휘관은 옐친에 충성을 선언했다. 옐친은 백악관 앞 탱크 위에 올라가 시민들에게 저항하라고 웅변했다.

 

1991년 8월 22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삼색기를 흔들며 쿠데타군에 맞서고 있다. /위키피디아
1991년 8월 22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삼색기를 흔들며 쿠데타군에 맞서고 있다. /위키피디아

 

그날 저녁, 야나예프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회견 도중에 술에 취한양 손을 떨었고,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쿠데타 지도부의 이런 나약한 모습이 군부와 인민들에게 실망을 안겼다.

쿠데타 세력은 군부에 백악관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특수부대가 백악관을 향해 이동했다. 21일 새벽 1,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군대가 백악관으로 향하는 터널에서 옐친 지지 부대와 충돌해 3명의 사망자를 냈다. 공격부대는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아야 한다며 돌아섰다.

쿠데타 세력은 더 이상 무력으로 제압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크림반도로 날아가 고르바쵸프에게 투항했다. 고르바쵸프는 비상위원회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주모자에 대한 수사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났다. 그 사이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했다. 소비에트 연방에 가담하다간 오히려 소련군에 짓밟힐수 있다는 위기감이 공화국 지도부를 압박했던 것이다.

 

1991년 8월, 쿠데타군에 맞서 러시아 의회를 포위하고 있는 시민들과 바리케이트 /위키피디아
1991년 8월, 쿠데타군에 맞서 러시아 의회를 포위하고 있는 시민들과 바리케이트 /위키피디아

 

19918월의 쿠데타 실패는 혁명기인 1917년 라브르 코르닐로프(Lavr Kornilov)의 실패한 쿠데타와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당시 쿠데타 실패로 케렌스키 정부의 통치력이 급격히 쇠락한 것처럼, 고르바쵸프의 정치 지도력이 무너졌다. 상대적으로 정치적 주도권은 쿠데타를 저지한 옐친에게로 넘어갔다.

옐친은 복귀하자 곧바로 소련공산당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 연방공산당 활동을 중지한 그의 명령은 초법적이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KGB 본부에 서있던 체카(Cheka)의 창시자 제르진스키 동상을 쓰러뜨렸다. 고르바쵸프는 공산당 서기장직을 내려 놓고 소련 대통령직만 보유했다. 공산당의 모든 문서와 재산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 116일 옐친은 러시아에서 공산당 활동을 금지시켰다. 한 때 공산주의자였던 그들이 스스로 공산당 해체에 나선 것이다.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 소련기가 내려가고 러시아기가 올라가는 모습 /위키피디아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 소련기가 내려가고 러시아기가 올라가는 모습 /위키피디아

 

19914분기 3개월 동안에 소련은 낙엽이 떨어지듯 해체되었다. 공산당이 없는 소련은 무정부상태나 다름 없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는 연방에서 탈퇴해 독립국으로 유엔에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고르바쵸프는 남은 공화국들을 추슬러 느슨한 형태의 연방으로 묶으려고 했다. 고르바쵸프의 마지막 노력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는 121일 독립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우크라이나인은 슬라브계로 러시아인과 동족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오랜 역사속에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지배를 받으며 2류 인종의 대우를 받은 것을 가슴에 묻어두고 있었다.

투표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선언법을 지지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찬반을 묻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국민투표에서 전체 유권자의 84.18%3,189만명이 투표에 참가해 92.3%의 압도적 지지로 독립이 가결되었다. 동시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레오니드 크라프추크(Leonid Kravchuk)가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다음으로 큰 공화국이고, 러시아와 동족이란 유대감이 있었다. 발트3국이 떨어져나갈 때만 해도 연방의 구성은 가능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택하면서 연방 구성은 사실상 물건너 가게 되었다.

 

1991년 12월 8일 러시아의 옐친, 우크라이나의 크라프추크, 벨라루스 슈시케비치 대통령이 CIS 결성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91년 12월 8일 러시아의 옐친, 우크라이나의 크라프추크, 벨라루스 슈시케비치 대통령이 CIS 결성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28일 러시아공화국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 우크라이나공화국의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대통령, 벨라루스 공화국의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Belavezhskaya Pushcha) 대통령이 만나 독립국 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결성을 선언하고, 조약에 서명했다. 각공화국이 독립국으로서 연대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동맹조약이다. 소련 연방을 구성하는 주요 3개국 공화국이 이탈함으로써 사실상 소련 연방이 해체되었다.

곧이어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몰도바, 투르크멘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등 8개 공화국이 추가로 가입해 1221일 서명함으로써 CIS는 모두 11개 공화국이 되었다. 발트 3국은 가입을 거부했고, 그루지아는 2년후에 가입했다.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최고회의가 소련 해체를 공식 선언하기 위해 모였다.  /위키피디아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최고회의가 소련 해체를 공식 선언하기 위해 모였다. /위키피디아

 

1225일 고르바쵸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폐지를 지지하지 않는다며 소련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다음날인 1226일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소련의 해체를 공식 의결했다. 이로써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192212월 소비에트 연방이 결성된지 69년만이고,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난지 74년만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1991 Soviet coup d'état attempt

Wikipedia,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Wikipedia, Boris Yelt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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