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기쁨도 잠시, 적백 내전에 돌입한 핀란드
독립의 기쁨도 잠시, 적백 내전에 돌입한 핀란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2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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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역사③…러시아 혁명 틈타 독립, 내전 후유증에 시달려

 

19172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황제이자, 핀란드 대공이었다. 핀란드와 러시아는 동일 군주에 의해 지배를 받았지만, 법률적으로 별도의 국가였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의 여파로 핀란드에 군주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핀란드는 러시아에서 총독을 파견하고, 하원에서 상원의원을 선출, 상원이 내각을 조직하는 정치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러시아 차르가 공위(空位)되고 총독도 궐위(闕位)된 상황에서 핀란드 하원은 좌파 사회민주당 소속 오스카리 토코이(Oskari Tokoi)를 총리로 선출했다. 당시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1916년 총선의 결과로 하원 전체 200석 가운데 과반이 넘는 103석을 확보하고 있었다.

핀란드는 곧바로 독립을 추진하지는 않았다. 아직 러시아 군대가 핀란드에 주둔하고 있었고, 러시아와 핀란드 사이에 새로운 주권협약이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의회 다수석을 활용해 자치의 확대를 추진했다. 19177월에 사회당은 주권법(Law of Supreme Power)을 가결시켰는데, 그 내용은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모든 입법을 의회가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권법이 핀란드의 정치갈등을 유발하고 러시아-핀란드 관계를 악화시켰다. 러시아 임시정부는 이 법안이 핀란드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고 거부했다. 아직도 러시아는 핀란드의 상국(上國) 노릇을 했다. 핀란드내 4개 보수정당도 사회민주당이 주권법을 통해 사회주의적 개혁을 시도할 것으로 우려하며 자치권 확대에 미온적이었다. 러시아 임시정부와 핀란드 보수정당은 서로 손을 잡고 사회민주당의 주권법을 반대했다.

사회민주당이 힘의 공백을 활용해 주권법을 밀어붙이자, 러시아 임시정부는 핀란드 주둔군을 파견해 의회를 해산시켜버렸다. 10월초에 실시된 핀란드 총선에선 보수 3개 정당이 200석 중 108석을 얻어 과반 의석을 넘었고, 사회민주당이 92석으로 소수파로 밀려났다.

때마침 러시아에서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이 성공했다. 이젠 주객이 전도되었다. 과반을 차지한 보수 연합세력은 볼셰비키 정권이 핀란드의 주권을 위협, 사회주의화할 것을 우려하며 독립을 추구했다. 이에 비해 좌파 사회민주당은 의회를 통한 권력장악을 포기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노동자-농민을 선동하며 혁명노선을 걸었다.

 

레닌이 서명한 핀란드 독립 승인장 /위키피디아
레닌이 서명한 핀란드 독립 승인장 /위키피디아

 

보수세력이 다수를 점한 핀란드 의회는 19171115일 독립 안건을 상정했고, 126일에 가결했다. 표결에서 사회민주당은 반대표를 던졌다. 126일이 핀란드의 독립기념일이 된 것은 이때부터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권은 당시 1차 세계대전을 단독강화하기 위해 독일과 협상을 시작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으로선 적백 내전을 각오해야 했고, 명목상으로 각민족의 자결권을 선포했기 때문에 차르 시절의 대공국에 개입할 여력이나 명분도 없었다. 핀란드의 페르 스빈후부드(Pehr Svinhufvud) 총리가 독립을 인정해달라고 러시아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레닌은 의외로 선선히 받아주었다.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은 1222일 핀란드의 독립을 승인했다.

 

내전 초기 적군과 백군 지역 /위키피디아
내전 초기 적군과 백군 지역 /위키피디아

 

핀란드 좌파들이 고립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볼셰비키의 지원을 얻어 부르죠아 세력을 타도화고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사회민주당은 헬싱키, 코트카, 투르크 등지의 도시 노동자와 농촌의 소작농으로 적위대(Red Guard)를 편성했다. 이에 대항해 공장경영자, 기업인, 관료, 지주들로 구성된 우파들도 민병대를 조직했다. 핀란드인들은 좌파 무장세력인 적군(Red Army), 우파 백군(White Army)로 갈라져, 충돌 직전의 상황이 되었다.

1918127일 헬싱키의 적군은 백군부대를 공격함으로써 내전이 시작되었다. 핀란드 내전(Finnish Civil War)은 그해 515일까지 3개월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러시아와 독일이 개입하는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적군은 선제공격으로 핀란드 남부의 도시지역을 차지했고, 백군은 중부와 북부 농촌지대를 장악했다. 적군은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조직력과 전투력이 약했고, 백군은 러시아군에 복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우세한 전투력을 보유했다.

백군 사령관은 러시아 제국군에 복무한 칼 만네르헤임(Carl Mannerheim, 1867~1951) 장군이 맡았다. 19183, 탐메르포르스(Tammerfors)에서 백군과 적군이 전면전을 벌였다. 백군은 독일이 지원했고, 적군은 러시아가 지원했다. 독일군은 남부 핀란드에 상륙해 헬싱키를 점령했고, 이 틈에 만네르헤임 장군은 적군의 보루였던 비보리(Vyborg)를 함락시켰다. 스웨덴은 중립을 지킨다고 했지만, 몰래 백군을 지원했다.

내전에서 적군은 완전히 패배했다. 적군 지도자들은 러시아로 도주했고, 적군 패잔병들은 투항했다. 이 내전에 참가한 병사는 양측에서 각각 10만여 명이었는데, 이중 적군 7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1918515일에 적군이 항복하면서 내전이 종료되었다.

핀란드 내전기간은 1차 대전이 종료되기 전이었다. 독일은 발트해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백군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지만,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자국내 내전에 휩쓸려 핀란드 좌파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다.

 

핀란드 내전기간 파괴된 빌딩 /위키피디아
핀란드 내전기간 파괴된 빌딩 /위키피디아

 

내전기간에 전투로 죽은 사람은 백군 3,400여명, 적군 5,200명 정도다. 하지만 내전이 끝난 후에 저질러진 백색 태러는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적군 포로 가운데 12,500명이 처형되거내 영양실조로 사망했고, 적군에 부역한 민간인 39.000명이 사망했다.

스웨덴 통치 600, 러시아 통치 100년 동안에 핀란드인들은 동족 간에 전쟁을 벌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상 처음 독립을 한 후에 그들은 서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였다. 내전은 핀란드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남부 지역과 서북부 지역 주민 사이에 큰 불신의 앙금을 남겼다.

내전후 보수정당들은 사회민주당을 연립정부에 포함시키는 등 유화정책을 폈고, 1939년에 발발한 소련과의 전쟁을 통해 국민통합의 계기를 마련했다.

 

내전 종식후 적군 포로를 수용한 수용소 /위키피디아
내전 종식후 적군 포로를 수용한 수용소 /위키피디아

 

내전이 종식된 직후, 독일은 전리품으로 자국인 헤센(Hessen)공 프리드리히 카를(Friedrich Karl)을 핀란드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하지만 독일이 곧바로 연합군에 항복선언을 했기 때문에 없던 일이 되었다. 19197월 핀란드는 공화제와 이원집정부제 헌법을 채택하고 초대 대통령에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Kaarlo Juho Ståhlberg)를 선출했다. 이후 핀란드는 독립국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Finnish Civil War

Wikipedia, History of Finland

Wikipedia, Finnish Declaration of Indepen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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