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에서 소련군 괴멸시킨 핀란드 스키부대
겨울전쟁에서 소련군 괴멸시킨 핀란드 스키부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25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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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역사④…스탈린, 핀란드를 만만하게 여기고 침공했다가 실패

 

강대국 옆에 사는 작은 나라는 언제나 침공의 위협에 시달린다. 핀란드는 스웨덴에 600, 러시아에 100년간 지배를 받다가 러시아 혁명기를 틈타 1917년에 독립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권은 내전에 승리하기 위해 변방국 핀란드의 독립을 허용했지만, 소련으로 체제를 바꾸어 안정되면서 다시 핀란드를 노렸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핀란드와 소련은 크고 작은 국경분쟁을 치렀다.

19398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은 동유럽을 나눠 먹는 내용의 이른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에 서명했다. 히틀러는 이 조약 체결을 계기로 폴란드를 침공했고, 이로부터 2차대전이 발발했다.

이 조약에 의하면 핀란드는 소련의 영향권(sphere of influence)에 포함되었다. 스탈린은 러시아 제국 시절에 차르 치하의 대공령이었던 핀란드를 손에 넣을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19391130, 소련군의 일방적인 핀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이듬해 312일 모스크바 조약으로 종전될 때까지 105일 동안 혹독한 겨울 내내 치러진 전쟁이었기에 겨울전쟁’(Winter War)이라고 불린다.

소련은 핀란드의 영토와 재산을 일부 빼앗았지만, 대국으로서의 체면을 구겼다. 작고 힘없는 나라라고 여겼던 핀란드의 응전 능력은 대단했고, 소련군은 덩치만 컸지 여러 전투에서 쩔쩔 매기만 했다.

이 전쟁에서 사망자는 핀란드측에서 25,000여명, 소련군은 126,000~168,000명으로 추산되었다. 부상자는 핀란드에서 43,000, 소련군은 18~20만명에 이르렀다. 사망자나 부상자 규모를 보면 이 전쟁은 핀란드가 이긴 전쟁이다. 하지만 핀란드의 입장에선 이 전쟁은 남부와 서부, 북부의 영토를 내주고, 섬 몇 개를 넘겨줘야 하는, 굴욕으로 끝난 전쟁이었다.

핀란드의 완강한 저항에 소련은 서둘러 전쟁에서 손을 떼고 싶어 했다. 핀란드도 3개월여 전투에서 기력을 소진했기에 종전을 원했다. 짧은 전쟁이었지만, 핀란드의 막강한 저항정신을 세계 최대육군 보유국 소련에 일깨워 주었다.

 

전쟁은 소련의 일방적 요구로 시작되었다. 193910월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가 핀란드를 방문해 일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협정체결을 요구했다. 스탈린의 영토욕을 반영한 조건이었다.

그 조항은 국경지대인 카렐리아(Karelia), 라플란드(Lappland)를 포함해 2,300의 영토 할양 수리사르(Surisar), 코틀린(Kotllin) 4개 섬과 올란드 제도 할양이었다. 한마디로 땅을 내놓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하라는 엄포였다.

카렐리아는 원래 러시아 영토였다가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가 핀란드에 편입시키면서 핀란드 영토가 되었던 곳이다. 소련으로선 옛 영토를 돌려달라는 주장이었지만, 핀란드인들은 원래 핀족의 땅이라며 거부했다. 올란드 제도는 발트해의 지정학적 거점이었다.

몰로토프는 핀란드가 당연히 거부할 것으로 알고서 "이제 내 역할은 끝났소. 나머지는 붉은 군대가 말할 것이오."라고 협박하고 돌아갔다.

소련은 핀란드를 만만히 보았다. 군대로 위협하면 땅을 내놓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핀란드는 몰로토프가 돌아가지 바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흰색 군복을 입고 눈 속 진지에서 중화기를 조준하고 있는 핀란드군 /위키피디아
흰색 군복을 입고 눈 속 진지에서 중화기를 조준하고 있는 핀란드군 /위키피디아

 

1130일 소련군은 헬싱키를 비롯해 핀란드 대도시 21곳을 폭격하고, 동시에 지상군을 투입했다.

당시 핀란드군은 보병 약 337,000346,500, 전차 33, 항공기 110여대였고, 소련군은 보병 약 46만명, 전차 3,200여대, 항공기 3,800여대였다. 군사력에선 소련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핀란드군의 저항은 격렬했다. 핀란드군은 현지 지형지물을 숙지하고 있었고, 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우파 정부와 오랫동안 갈등을 치렀던 핀란드 공산당이 조국 방위에 나섰다.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 해소되었고, 언어적 파벌 대립관계도 풀어졌다. 미국에 이민 갔던 핀란드인도 조국 방위를 위해 돌아왔다. 서유럽에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의용군이 자진해서 핀란드 편에 섰다.

 

핀란드인들은 소련의 막강한 공군력과 탱크에 맞서기 위해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을 채택했다.

흰 군복을 입은 스키부대는 설원을 기동력 있게 이동하며 소련군을 괴롭혔다.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되었던 화염병도 활용했다. 핀란드인들은 화염병을 몰로토프 칵테일(Molotov cocktail)이라고 불렀다. 소련군이 개전 초기에 헬싱키 도심에 무차별 소이탄을 투하하자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이 쏟아졌는데, 당시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은 우리는 원조용 빵을 투하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핀란드인들은 몰로토프에게 복수하기 위해 화염병을 던지며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영하 40도 이하가 보통이었으며, 같은 겨울나라인 소련군도 이 추위에는 버티기 힘들었다. 추위에는 핀란드인이 더 강했다.

소련군의 무능도 드러났다. 스탈린의 숙청에서 살아남은 지휘관들은 상부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했지만, 변화하는 전술 상황에 미숙하게 대처했다. 127일 소비에트 보명 163사단은 핀란드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16,000여명의 소련군은 3,000여명의 핀란드 스키부대의 기습공격에 포위되어 절반 가까이 사망했다. 소련군 탱크, 트럭, 대포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고, 시체들이 눈밭에 뒹굴었다.

 

핀란드군 매복 포위작전에 나뒹구는 소련군 시체와 전투장비들 /위키피디아
핀란드군 매복 포위작전에 나뒹구는 소련군 시체와 전투장비들 /위키피디아

 

하지만 핀란드군에겐 장비와 무기가 절대 부족했다. 정규군 이외에는 군복도 배급받지 못했고, 소총도 집에서 쓰던 것을 가져와야 했다. 해를 넘기면서 핀란드 군에 탄환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웃 스웨덴은 말로만 도와준다 하면서 차일피일했고, 영국과 프랑스군의 지원도 시원치 않았다.

1940년 이웃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5세는 핀란드에 정규균 지원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2, 소련군은 핀란드의 마지노선 격인 만네르헤임 선이 소련군에 의해 무너졌다. 핀란드는 협상을 선택했다. 소련도 전쟁이 장기화하길 바라지 않았다.

229일 양측은 협상에 들어갔다. 1940312일 모스크바에서 소련 외무상 몰로토프와 핀란드 총리 리스토 리티(Risto Ryti)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평화의 조건은 가혹했다. 이 강화조약에서 핀란드는 국토 중동부의 살라(Salla)와 인구의 12퍼센트에 해당되는 42만 명이 살고 있는 산업중심지 카렐리야(Karelia)를 소련에 빼앗겼다. 또 북부 바렌츠 해(Barents Sea)에 접한 칼라스타얀사렌토(Kalastajansaarento) 반도와 핀란드 만에 산재한 여러 섬들도 내주었다.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가 소련에 빼앗긴 영토 /위키피디아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가 소련에 빼앗긴 영토 /위키피디아

 

곧이어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치욕감에 독일 편에 붙었다. 그리고 이번엔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해 소련을 침공했다. 1941625일에 재개되어 1944919일까지 이어진 이 전쟁을 핀란드에선 계속전쟁(Continuation War)이라고 부른다.

핀란드는 계속전쟁에서 잃었던 땅을 일시적으로 수복했지만,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연합국 측으로 돌아섰다. 소련이 연합국 일원이었으니, 당연히 계속전쟁도 중단해야 했고, 수복했던 땅도 돌려주었다.

아직도 핀란드는 겨울전쟁에서 빼앗긴 땅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Finland

Wikipedia, Winter War

Wikipedia, Continuatio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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