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권 붕괴①…민주세력이 첫 승리한 폴란드
공산권 붕괴①…민주세력이 첫 승리한 폴란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2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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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리다리티, 1989년 총선서 대승…소비에트블록 해체의 신호탄

 

1989824일 폴란드에서 반체제 지식인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Tadeusz Mazowiecki)가 총리에 선출됨으로써 공산국가로는 처음으로 비공산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폴란드는 동유럽 공산권에서도 민족적이고,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였다. 2차 대전후 소련 점령군에 의해 인위적으로 공산정권이 들어섰지만, 뿌리 깊은 폴란드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는 40여년 철권통치를 무너뜨리고 인류역사에 신기원을 만들었다.

폴란드 공산정권을 붕괴시킨 힘은 피플 파워였다. 소련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 정책이 동유럽에 스며들면서 그동안 억눌려왔던 폴란드인의 민주화 열망이 투표로 집결되었고, 끝내는 무혈의 정권교체를 이뤄낸 것이다.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위키피디아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위키피디아

 

폴란드는 1945년 독일로 진격하던 소련군에 의해 점렴되어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정통성 있는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를 무시하고,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은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을 앞세워 정권을 수립했다.

소련 흐루쇼프 시기인 19566월 폴란드 산업도시 포즈난에서 노동자 10만명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폴란드 공산당은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이 과정에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새로 집권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 정권은 부분적 개방조치를 시행하면서 시위를 무마했다.

 

1978년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르 2(John Paul II.)가 교황이 되면서 다시 자유화의 바람이 불었다. 19796월 교황이 조국을 방문했을 때, 수백만명의 인파가 몰렸고, 요한 바오르 2세는 군중들에게 사회제도의 개혁 필요성을 역설했다.

교황의 연설에 감명받은 사람 가운데 그단스크의 레닌조선소 크레인기사 안나 발렌티노비츠(Anna Walentynowicz)가 있었다. 그녀는 편지를 보내며 교황과 친분관계를 맺고, 동료들과 카톨릭의 정의를 전파하는데 열심이었다.

어느날 조선소 감독이 노동자들의 보너스를 착복해 도박에 탕진한 일이 발생했다. 그녀는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그런데 비밀경찰은 부패한 감독을 징계하지 않고, 그녀에게 오히려 모욕을 주었다. 노조는 공산당의 앞잡이였다. 그녀는 기존 노조를 불신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공산당과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유노조를 설립했다. 당국은 자유노조를 불법단체로 규정했다. 발렌티노비츠는 정년을 5개월 앞두고 회사에서 해고되었다. 그녀에 대한 부당해고는 조선소의 총파업 투쟁으로 이어졌다. 자유노조 지도부는 파업투쟁을 임금인상 투쟁으로 전환했다.

 

1980년 8월 안나 발렌티노비츠와 레흐 바웬사 /위키피디아
1980년 8월 안나 발렌티노비츠와 레흐 바웬사 /위키피디아

 

이 작은 불씨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1970년대말 폴란드 경제는 어려웠다. 1, 2차 오일쇼크로 물가가 고공행진했지만 임금은 그대로였다. 그다니스크 자유노조에 힘입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투쟁이 철강, 광산업 등 전산업으로 확대되었다. 해고노동자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가 선두에 서서 총파업을 이끌었다.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공산국가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유노조가 생긴 것은 이례적이다. 폴란드 자유노조는 노동당그 그 정권을 거부했다.

폴란드 정부는 마지못해 자유노조와 협상에 나섰다. 노조는 21개항을 요구했다. 공산정부는 이중 대부분을 수용해 1980831일 그단스크 협정(Gdańsk Agreement)을 체결했다. 협정에는 최저임금 보장, 휴일 근무 폐지, 노동감시 폐지, 근로자 경영권 참여 등이 포함되었다. 무엇보다도 자유노조가 합법적으로 인정되었다. 바웬사는 그해 9월 자유노조의 연합조직으로 솔리다리티(Solidarity)를 결성했다.

폴란드 노동당의 타협적 태도는 모스크바의 비판을 받았다.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바르샤바조약기구 수반들은 198012월 모스크바 국제공산당회의에서 폴란드 노동당의 결정을 비판했다.

19812월 국방장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Wojciech Jaruzelski)가 총리가 되었다. 그는 자유노조에 대한 강경진압을 주장했다. 솔리다리티의 파업이 계속되었다. 솔리다리티는 점점 정치적 요구를 강화해 나갔다. 1213일 야루젤스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노동자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리고 솔리다리티를 불법화하고, 바웬사 등 자유노조 지도자들을 구금했다.

 

1980년 8월 그단스키 조선소의 총파업 현장에 바웬사가 연설하고 있다.
1980년 8월 그단스키 조선소의 총파업 현장에 바웬사가 연설하고 있다.

 

1985년 소련에서 고르바쵸프가 당서기장이 되면서 개혁과 개방의 물결이 폴란드에도 밀려왔다. 야루젤스키 정권은 1986년 대사면과 함께 미온적인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지하에 잠복해 있던 자유노조 지도자들이 세력화하면서 투쟁솔리다리티, 청년투쟁연맹, 자유평화운동, 오렌지운동 등의 여러 민주단체가 생겨났다.

야루젤스키 정권은 민주화 세력의 요구가 분출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개혁조치를 내놓고, 19871129일 경제개혁안과 정치개혁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전체 유권자의 3분의1이 투표에 불참했다. 선거 결과, 1(경제개혁)은 투표자의 66%, 2(정치개혁)69%의 찬성표를 얻었다. 폴란드 국민투표법에는 총유권자의 과반을 얻어야 안건을 통과시키도록 되어 있었는데, 유권자의 34%가 투표를 거부했기 때문에 1안은 44%, 2안은 46%, 과반을 얻지 못해 부결되었다. 공산국가의 국민투표에서 안건이 거부되기는 최초였다.

 

국민투표는 야루젤스키 정권에 대한 신임투표 성격을 띠었다. 그들은 미봉적 개혁으로 민주화 요구를 잠재우려 하다가 민의의 역습을 당한 것이다.

공산정권은 바웬사를 비롯해 지하 정치세력과의 타협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폴란드 민주세력 내에 여러 노선이 분출했다. 당장에 대규모 총파업을 통해 야루젤스키 정권을 끝내자는 측과 정부와 협상을 통해 단계적으로 민주화 일정을 얻어내자는 측이 대립했다. 바웬사는 후자였다. 그는 솔리다리티 의장을 맡아달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정부에 협상 테이블을 만들 것을 요구했다. 그는 무모한 파업투쟁이 군부를 자극해 모처럼의 기회를 잃을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아직도 집권자는 솔리다리티를 파괴한 야루젤스키였다.

1988년 강경파 노조지도자들은 파업을 유도했다. 하지만 그 위력은 1980년 총파업에 미치지 못했다. 바웬사는 노조의 파업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19892월초 야루젤스키는 바웬사 등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26일부터 44일까지 두달에에 걸친 원탁회의(Round Table Talks)에서 야루젤스키 정권과 바웬사 등 노조지도자들 사이에 대타협이 이뤄졌다. 원탁합의(Round Table Agreement)의 골자는 솔리다리티를 합법화하며, 솔리다리티가 참여하는 총선을 치러 차기 정권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솔리다리티는 하원 지역구 가운데 35%에서만 출마가 허용되었다. 솔리다리티 입장에서는 지나칠 정도의 불평등한 조건이었다.

 

1988년 5월 바르샤바 대학의 민주화 시위
1988년 5월 바르샤바 대학의 민주화 시위

 

64일 실시된 총선에서 대이변이 일어났다. 460석의 하원 선거에서 솔리다리티는 35%161개의 지역구에 후보를 내 전원 당선되었다. 집권 노동당은 173석으로 37.6%, 노동당의 자매당인 통합인민당 117(16.5%), 민주동맹당 27(5.8%)를 얻었다. 노동당과 우호세력이 하원의 과반수를 넘었다. 하지만 참여의 제한이 없었던 상원은 솔리다리티가 싹쓸이를 했다. 100석 가운데 99석을 솔리다리티가 석권했고, 1석이 무소속에게 돌아갔다. 상원 선거에서 노동당이 한 석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은 유권자들이 노동당에 등을 돌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717일 그단스크 합의에 의해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야루젤스카는 단독으로 출마해 출석의원 537명 중에서 270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과반수에서 고작 1표를 더했을 뿐이다. 솔리다리티 의원들은 원탁합의에 따라 기권했다. 기권율이 43%였다.

야루젤스키는 노동당 제1서기직을 내려 놓고, 폴란드 대통령에 취임했다. 폴란드 초대 대통령은 노동당 출신 체스와프 키슈차크(Czesław Kiszczak)를 지명했고, 의회의 동의를 얻었다.

야루젤스키 정권은 인플레이션과 싸우기 위해 시장을 개방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시장경제 운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키슈차크 총리는 얼마 안가 경제 무능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야루젤스키가 후임 총리를 물색하던 중에 노동당의 2중대, 3중대 역할을 해온 통합인민당과 민주동맹당이 솔리다리티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노동당의 충견 역할을 하던 위성정당들의 배신은 노동당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솔리다리티는 오랫동안 반정부투쟁을 벌여온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를 총리 후보로 내세웠다. 마조비에츠키는 824일 의회에서 압도적 표결을 얻어 총리에 선임되었다. 이로써 보비에트 블록에서 처음으로 비공산권 정부가 탄생했다.

마조비에츠키 정부는 미국의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교수의 지도를 받아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바웬사는 인플레이션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유노조에 파업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

1990년 야루젤스키는 더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할 역량이 없음을 자인하고 하야했다. 19901125일 전국적인 자유투표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레흐 바웬사는 74.3%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Revolutions of 1989

Wikipedia, Solidarity (Polish trade union)

Wikipedia, History of Poland (1945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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