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의 또다른 초상화도 보물 반열에 올랐다
송시열의 또다른 초상화도 보물 반열에 올랐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1.04.2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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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불상등 불교문화재 3점도 국보승격, 보물 지정 예고

 

송시열은 조선중기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사색당파 가운데 서인의 수령이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초상화는 1987년에 국보 2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에 그의 또다른 초상화가 보물 후보로 올랐다.

문화재청은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지정할 것을 예고했다. 아울러 송시열 초상울진 불영사 불연’,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등 3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4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에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송시열 초상 /문화재청
송시열 초상 /문화재청

 

송시열 초상

조선 중기 정치와 학문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모습을 그린 18세기 초상화로, 제천 황강영당(黃江影堂)300년 넘게 봉안되어와 그동안의 내력이 분명한 작품이다. 2012년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작품 상단에는 우암 송선생 칠십사세 초상(尤庵宋先生 七十四歲 眞)’이라는 화제가 적혀 있어 74세 때 송시열의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 속 송시열은 네모난 회색 사방건(四方巾, 귀퉁이가 네모난 직사각형 모자)을 쓰고 검은색으로 깃과 소맷부리의 가장자리를 두른 회색 심의(深衣, 유학자가 평상시 입는 옷)를 입은 채 두 손을 맞잡아 소매 속에 넣은 반신상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주름이 깊게 파인 이마와 눈가, 희끗희끗한 콧수염과 턱수염 등이 인상적이며, 마치 정치와 학문에서 그의 굴곡진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희고 검은 긴 수염은 세밀하게 표현한 반면 눈썹은 검고 짙게 그렸고, 황갈색으로 주름과 음영을 표현한 얼굴의 상세한 묘사와 달리 의복은 짙은 먹 선 위주로 굵고 간략하게 묘사한 점 등 서로 대비되는 필선을 통해 송시열의 학자적 풍모와 기상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송시열의 초상화는 후대에도 추앙이 지속되면서 약 30점의 많은 작품이 전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진재해(奏再奚, 16911769) 등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우수한 사례에 속한다. 유려하면서도 단정한 필선, 정교한 채색으로 뛰어난 예술성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국보 송시열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견주어도 수준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작품이다.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문화재청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문화재청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교조각 중 삼신불(三身佛)’로 구성된 유일한 작품으로 2008년 보물로 지정되어 17세기 불교사상과 미술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아 왔다.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奉安)3구의 좌상은 모두 3미터가 넘는 초대형 불상으로 앞도적인 느낌을 준다. 1635(인조 13) 당대 유명한 조각승인 청헌(淸軒 또는 淸憲)과 응원(應元), 인균(印均)을 비롯해 이들의 제자들이 만든 17세기의 대표적 불교조각이다.

특히, 삼신불의 복장유물 등 관련 기록이 최근 발견되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화엄사를 재건(16301636)하면서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삼신불을 제작한 시기(16341635)와 과정, 후원자, 참여자들의 실체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발원문에 의하면 전국 승려집단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역임한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의 주관 아래 선조(宣祖)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 부부와 선조의 사위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부부 등 다수의 왕실 인물과 승려 580여명을 포함한 총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했다.

이 불상은 화려한 연꽃을 갖춘 대좌(臺座, 부처의 앉는 자리)와 팔각형 목조대좌에 다리를 서로 꼰 결가부좌(結跏趺坐) 자세로 앉아 있다. 거대한 규모와 더불어 단순하면서도 선이 굵게 처리된 조각솜씨로 인해 중후한 느낌을 더한다. 이 삼신불상은 당시 가장 유명했던 조각승 집단인 청헌파와 응원인균파가 참여한 만큼 표현에서도 각 유파(流派)의 조각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근엄한 표정의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상은 청헌파가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는 반면, 부드러운 얼굴에 작은 눈과 두툼한 눈두덩이가 표현된 노사나불상은 응원과 인균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청헌, 응원, 인균과 제자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 완성한 기념비적인 대작(大作)으로, 이는 불사를 주관한 벽암 각성, 의창군 이광 등 왕실의 후원이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제작된 목조불상 중 크기가 가장 크고, 조각으로 유일하게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여래불로 표현된 삼신불 도상이라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고 중요할 뿐 아니라 예술조형적 수준도 조선 후기 불상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울진 불영사 불연 /문화재청
울진 불영사 불연 /문화재청

 

울진 불영사 불연

1670(현종 11) 화원(畵員)으로 추정되는 광현(廣玄), 성열(性悅), 덕진(德眞) 등이 참여해 조성한 2기의 불교의례용 가마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약 20기의 조선 후기 불연(佛輦, 가마) 중 형태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사례이다. 불교목공예의 일종인 불연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불연(佛輦)은 불가(佛家)의 불보살상(佛菩薩像), 사리(舍利), 경전, 불패(佛牌, 불보살의 존호나 발원내용을 적은 나무패), 영가(靈駕, 망자) 등 예배의 대상을 가마에 싣고 의식이 거행되는 장소로 모셔오는 시련의식(侍輦儀式)에서 쓰이는 매우 중요한 의식법구다.

지금까지 알려진 불연은 모두 17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고, 그 중에서도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은 극히 드물다. 반면 울진 불영사 불연2기 모두 1670년이라는 분명한 제작시기와 승려 학종(學宗)이 좋은 장인을 만나 불연을 제작하게 되는 동기와 배경, 제작에 동참한 시주자, 불연의 제작자로 추정되는 스님 등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교목공예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균형미를 갖추었고 나무로 얽어 만든 둥근 궁륭형(穹窿形) 지붕과 네 귀퉁이의 봉황조각, 난간의 용머리 장식, 가마의 몸체 전면에 표현된 연꽃, 국화, 화초 장식 등에서 보이는 조형미와 조각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특히, 불연의 몸체 주렴(珠簾)에 동경(銅鏡, 청동거울)을 매단 최초의 사례로,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되는 동경이나 불화의 복장낭(腹藏囊) 앞에 매단 동경과 같이 어두움을 밝히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상징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불연의 동경은 불교 의례 연구에 있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학술적 의의가 있다.

불영사 불연은 조선 후기 불연 중 제작 당시의 온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고 제작배경을 상세히 담은 명문이 남아 있고, 공예기술 면에서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문화재청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문화재청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1656(효종 7) 만들어진 불상으로, 당시 제작된 나한상 중 수량과 규모면에서 가장 큰 작품이다. 이 일군의 불상은 제작에 있어 수조각승 무염(無染)의 통솔 아래 조각승들이 14명씩 분담해 제작했다. 참여 조각승들은 무염·승일파(無染勝一派), 현진·청헌파(玄眞淸憲派), 수연파(守衍派) 등 역량이 뛰어났던 17세기 조각장들을 계승한 인물들이자 당시 불교계를 대표한 승려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그 만큼 완주 송광전 나한전 불사의 중요성을 가늠케 한다.

완주 송광사 불상은 조각과 더불어 개금(改金개채(改彩) 작업 등 조각승과 불화승간의 협업 체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영역이 다른 화원들이 어떻게 협업관계를 구축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당시 유행한 목조와 소조, 채색 기법 등을 두루 활용하여 작가의 재치와 개성이 잘 드러나 있고 작품성도 뛰어나며, 나한상과 동자상을 일체형으로 제작한 창의성도 돋보인다.

이 불상들은 송광사를 본산으로 활약했던 조각승들의 활동체계와 제작태도, 경향 등을 밝힐 수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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