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내 온건파 반란으로 민주화 실현한 불가리아
당내 온건파 반란으로 민주화 실현한 불가리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29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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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④…터키족 탄압에 소련도 등 돌려, 위로부터의 개혁 단행

 

불가리아의 공산정권은 의외의 사건에 의해 붕괴되었다. 폴란드나,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처럼 격렬한 민주화 시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산당 내부의 궁정쿠데타에 의해 35년간 장기집권한 토도르 지프코프(Todor Zhivkov)가 실각하고, 새로 집권한 온건한 공산주의자들이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발단은 불가리아 내 터키족 탄압이었다. 불가리아 공산당 서기장이자, 국가위원회 의장인 지프코프는 1984년에 민족부활운동(Revival Process)을 추진하며 터키족에게 성()을 불가리아어로 바꾸도록 요구했다. 과거 오스만투르크 제국 지배 시기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의도였다. 민족주의는 집권자들이 정권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 과정에서 유혈충돌이 벌어지고, 1989년엔 터키족 36만명이 고향을 등지고 터키로 이주해야 했다. 지프코프의 인종청소는 국내 지배층의 반발을 초래했고, 소련과 서방국가의 비난을 자초했다. 정권내 온건파들이 지프코프를 제거하기로 모의했고, 그는 19891110일 공산당 정치국회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공산당은 당명을 사회당으로 바꾸고, 복수정당 선거에 의해 민주화 과정을 밟아 나간다.

 

1980년대 토도르 지프코프 /위키피디아
1980년대 토도르 지프코프 /위키피디아

 

지프코프는 원래 개혁적인 인물로 지목되었다. 스탈린이 죽은지 1년후인 1954, 불가리아 공산당은 스탈린주의자인 발코 체르벤코프(Valko Chervenkov) 서기장을 전격적으로 실각시키고 지프코프를 당서기장으로 선출했다. 이때부터 지프코프는 1989년까지 35년간 불가리아를 통치했다.

지프코프는 소련 흐루쇼프의 개혁노선을 모방해 경제분야에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그는 스탈린식 계획경제를 탈피해 공장과 농가에서 생산한 잉여 상품을 시장에서 자유롭게 팔수 있도록 허용하고, 동유럽 관광객들을 유치했다.

지프코프는 농업국가인 불가리아를 산업국가로 변모시켰다. 에너지 산업, 광산업을 육성하고 수십개의 수력발전소를 설립했다. 그는 경공업과 소비재 산업을 장려해, 당시 공산국가에서는 구하기 어려웠던 담배, 초콜릿과 같은 상품도 불가리아에선 생산되었다.

특히 컴퓨터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는데,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다. 덕분에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컨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공업화가 빠르게 진척되면서 불가리아는 동유럽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로 꼽혔고, 공산주의 발전의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서방국가의 자본도 불가리아를 동유럽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미국의 코카콜라가 불가리아에 진출했고, 프랑스의 르노, 이탈리아 피아트와 같은 자동차회사도 불가리아에 현지공장을 세웠다.

 

불가리아에서 개발된 최초이 컴퓨터 /위키피디아
불가리아에서 개발된 최초이 컴퓨터 /위키피디아

 

하지만 지프코프는 정치외교 면에서는 소련의 정책을 추종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 불린 민주화시위가 벌어졌을 때 소련군과 함께 진압부대를 파견했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도 군대를 보냈다.

집권 말년에 그는 더욱 권력에 집착했다. 그는 불가리아를 500년간 지배한 오스만투르크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예인 터키공화국과 사사건건 대립했고, 마지막에는 국내거주 터키족에게 민족동화정책을 강요했다. 당시 불가리아 내 터키족은 90만명으로 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었다.

1774년 터키가 키프러스의 터키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침공했을 때, 지프코프와 당지도부는 터키의 불가리아 침공을 우려했다. 이어 1980년 터키에서 우익 군부쿠데타가 일어나자 지프코프는 터키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강화했다.

198412월 지프코프 정권은 불가리아 터키족에게 성씨개명운동을 벌였다. 이슬람의 종교적 활동과 터키어 사용도 금지했다. 명분은 그럴듯했다. 인종 간의 장벽을 해소하고 단결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소수민족인 터키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8412241,200명의 터키족이 터키국경 근처 마을에서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이후 터키인들의 시위는 폭력화했다. 터키족은 마을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물대포를 쏘았다. 불가리아 경찰과 터키족의 대치는 점차 폭력화해 화염병과 사제폭탄까지 등장했다. 지프코프 정권은 탱크까지 동원해 진압했다.

터키와 아랍계는 테러로 맞섰다. 공항 주차장에 폭탄이 터지고, 철도역사가 폭파되고, 호텔에도 폭탄공격이 가해졌다. 불가리아보안당국에 따르면, 불법적인 터키족 단체가 42개에 이르고, 1984~1989년 사이에 500여명이 투옥되었다.

19895, 지프코프는 마침내 터키 국경을 열어 터키족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다. 강제추방이었다. 36만명의 터키족이 불가리아를 떠나 터키 영내로 이주했다. 이는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터키족의 40%에 해당한다. 2차 대전 이후 동유럽 거주 독일인이 추방당한 이후 최대규모의 인종청소였다.

 

소피아 시내 불가리아 공산당 당사(1984) /위키피디아
소피아 시내 불가리아 공산당 당사(1984) /위키피디아

 

이 사건은 지프코프 정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미국과 서유럽은 물론 소련마저도 불가리아를 비난했다. 소련의 고르바쵸프 서기장은 불가리아의 지프코프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소련 당국은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체코슬로바키아의 구스타프 후사크,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챠우세스쿠와 함께 지프코프를 반개혁 인물로 설정했다.

불가리아 공상당 지도부에서도 이런 기류를 감지한 사람들이 많았다. 총리 게오르기 아타나소프i(Georgi Atanasov), 외무장관 페타르 믈라데노프(Petar Mladenov), 재무장관 안드레이 루카노프(Andrey Lukanov)는 비밀리에 지프코프의 퇴진을 의논했다. 이들은 국방장관 도브리 드주로프(Dobri Dzhurov)의 동의를 얻었다.

그해 10월에 유럽안보협력회의(OSCE) 개최가 소피아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외무장관 믈라데노프는 환경단체들을 이 회의에 대거 초청했다. 환경활동가들은 불가리아의 정치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했다. 지프코프는 경찰력을 투입시켜 반정부 구호를 외친 사람들을 체포했다. 체포된 36명은 차량에 실려 소피아시 외곽에 던져졌다. 그들은 걸어서 소피아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다시 국제적인 비난을 샀다.

정부내 음모자들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1110일 열리는 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 반전을 도모하기로 했다. D-데이 하루 전에 국방장관은 지프코프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지프코프는 깜짝 놀라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지만, 국방장관이 이미 손을 쓴 후였다. 1110일 공산당 정치국은 표결을 통해 지프코프를 축출하고, 사형을 의결했다. (지프코프는 재판 도중인 19905월에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불가리아 위치 /위키피디아
불가리아 위치 /위키피디아

 

차기 공산당 서기장엔 지프코프 제거 음모자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믈라데노프가 선출되었다. 믈라데노프는 개혁주의자였다. 새로 조직된 공산당 지도부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처럼 민주화시위가 폭발하기 전에 먼저 민주화 조치를 취하는 것만이 당의 몰락을 막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새 집행부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허용했다. 새로운 정당이 조직되고, 1117일에는 대규모 민주화시위가 처음으로 일어났다. 127일 민주정당 7개가 합당해 민주세력연합(Union of Democratic Forces)을 구성했다.

1211일 공산당은 독점적 지위를 포기하고, 내년에 복수정당이 참여하는 총선을 실시한다고 선언했다. 공산당은 이어 당명을 사회당으로 개명했다. 나라의 정체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에서 불가리아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1990610일 공산당 집권 이해 최초의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공산당에서 변신한 사회당이 전체 400석 가운데 과반인 211석을 얻었다. 민주세력은 144석을 차지했다. 불가리아의 민주역량이 아직 공산세력을 배제할 정도에까지 이르지 않은 것이다. 또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한 공산당의 전략이 통한 것이기도 하다.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불가리아 사회당은 다른 동유럽국가에서 취해진 것처럼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국민들에게 자유를 보장했다. 민주세력은 1991년에 정권을 장악했다. 1994년에 다시 사회당이 집권한다. 40여년간 권력을 독점한 불가리아 공산당은 서유럽의 사회당처럼 선거를 통해 권력을 지향하는 북수정당제도의 일개 정당으로 변신한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Bulgaria since 1990

Wikipedia, People's Republic of Bulgaria

Wikipedia, Todor Zhivkov

Wikipedia, Revival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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