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알바니아, 민주화 바람에 선제적 대응
은둔의 알바니아, 민주화 바람에 선제적 대응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30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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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⑤…독재자 호자의 후임 엘리아, 민주화 요구 수용

 

알바니아는 아드리아해 동쪽에 위치하며, 면적 28,7748로 경상남북도를 합친 규모이고, 인구는 인구 280만명인 작은 나라다. 산이 많은 지형에, 이슬람 신자가 인구의 60%에 가까운, 유럽에서 보기 드믄 이슬람 국가다.

이 나라는 중세 이래 공국을 유지하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500년간 받았다. 1912년 독립했으나, 2차 대전 때에 이탈리아의 침략과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알바니아의 공산화는 194411월 소련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파시스트 민족해방 세력에 의해 독자적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알바니아 노동당 정권은 애초부터 모스크바로부터 독립적 지위를 가졌고,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다.

이 나라의 공산주의는 1946년부터 1985년까지 40년간 장기집권한 엔버 호자(Enver Hoxha)를 빼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1990년에 시작된 알바니아 탈공산화는 호자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알바니아 벙커 /위키피디아
알바니아 벙커 /위키피디아

 

엔버 호자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심장병 전문의를 하다가 1941년 이탈리아의 침공에 맞서 파르티산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곧바로 알바니아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고, 1944년 나치 독일이 퇴각할 무렵 알바니아를 해방시컸다. 2년간의 통일전선 정부를 거쳐 1946년 공산정권을 수립, 지도자로 부상한다.

그는 철저한 스탈린주의자였다. 스탈린 시기엔 소련과의 관계가 말착했다. 하지만 1953년 스탈린 사망후 흐루쇼프의 해빙정책을 수정주의로 몰아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때 호자는 같은 노선의 중국 마오쩌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가 마오쩌둥 사망후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에 반발해 중국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북한과는 초기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강조하자 수정주의 노선이라며 등을 돌렸다.

호자는 늘 외부의 침공을 우려했다. 미국의 지중해함대가 포격할 것을 두려워했고, 1968프라하 봄진압 이후 소련이 공중과 해상으로 침공할 것을 염려했다. 그는 강대국의 침공에 대비해 전국에 토치카를 설치했다. 그의 시기에 만든 토치카(벙커)1당 평균 5.7개로, 전국토애 173,371개가 설치되었다. 벙커 작업에 80만명이 동원되는 바람에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건설을 등한시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지금도 알바니아에는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벙커가 상당수 남아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용과 창고로 쓰인다고 한다.

호자는 나라의 문을 꽁꽁 닫아 걸었다. 그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며 금지했고, 알바니아계 테레사 수녀가 1971년에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입국을 신청했으나 거절했다. 하지만 여성정책은 개방해 주요기관에 여성 비율이 40%에 달해 유럽에서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일반인의 해외여행은 금지되었고, 미디어는 통제되었다.

그도 인간의 운명을 피할수 없었다. 1973년부터 심장병을 앓기 시작해 1970년대 후반에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그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통치권을 놓아주지 않았다. 1985411일 그가 사망함으로써 40년간의 독재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등장해 개혁-개방조치가 시행되었다. 호자 사망후 2인자었던 라미즈 알리아(Ramiz Alia)이 노동당 서기장이 되었다. 독재자가 죽은후 체제에 대한 불신이 높아졌고, 경제는 침체의 수렁에 빠졌다.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 인민들은 지쳤고, 숨도 쉬지 못하던 지식인들은 당의 엄격한 규율에 실증을 느꼈다.

알리아는 점진적으로 경제개혁을 단행하고 서유럽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개선하면서 숨통을 열어 나갔다. 하지만 언론 통제는 풀지 않았다. 알바니아 인민들은 외부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 사실을 안 사람은 소수였다.

1989년말 루마니아에서 니콜라에 챠우세스쿠가 처형된 소식을 들었을 때, 알리아는 그 다음이 자신이라고 인식했다. .

최초의 민주화 시위가 19901월 북부 도시 슈코더르에서 일어났다. 수백명의 시민들이 스탈린 동상을 무너뜨렸고, 시위의 여파는 다른 도시로 전파되었다. 알리아는 해외여행 개방 등 일부 자유화 조치를 시행했다. 그는 서둘러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헬싱키 조약에 서명하고, 19908월에 지식인들을 불러 정치시스템의 개혁을 의논했다.

 

살리 베리샤 /위키피디아
살리 베리샤 /위키피디아

 

아이러니하게도, 알바니아 민주화의 지도자는 공산당원이었다. 살리 베리샤(Sali Berisha)도 독재자 호자와 마찬가지로 심장병 전문의로 프랑스에서 공부를 했다. 그가 호자와 다른 점은 프랑스의 자유주의를 배웠다는 점이다. 그는 노동당에 입당해 개혁파로 활동했다. 1990년 알리아 서기장에게 노동당 일당주의를 폐기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인권을 보장하고 헌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며, 국내에 스탈린 동상을 모두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또 언론 기고를 통해 알리아의 개혁이 화장술에 불과하며, 복수정당제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를 달성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지방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는 1990년말에 수도 티라나로 상경했다. 129일 독재자가 세운 엔버 호세 대학에서 민주회 시위가 열렸다. 1211일엔 시위대가 3,000명으로 불어났고, 베리샤도 노동당 당원 신분으로 집회에 참여했다.

엘리야 정권은 처음엔 시위를 저지했지만, 더 이상 시위를 막지 않았다. 학생들은 민주정당을 허용할 것을 요구했고, 알리아는 마침내 복수정당을 허용했다.

베리샤는 노동당을 탈당하고 알바니아 민주당 창당멤버로 참여했다. 그해 12월 민주당이 창당되고, 베리샤는 민주당 의장에 선출되었다.

 

시위대에 의해 티라나의 엔버 호자 동상이 무너지고 있다. /위키피디아
시위대에 의해 티라나의 엔버 호자 동상이 무너지고 있다. /위키피디아

 

알리아는 1991년 신년연설을 통해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복수정당제에 의한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시위는 격화되었다. 220일 수천명의 시민들아 타라나 도심의 스칸데르베그 광장(Skanderbeg Square)에 몰려나와 알바니아 공산당의 상징인 엔버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렸다.

1991331일에 실시된 총선은 공산당 집권 이후 최초의 자유선거였다. 개표 결과, 노동당이 56%의 지지를 얻어 총 250석중 169석을 차지, 재집권에 성공했고, 민주당은 76석을 얻는데 그쳐 야당이 되었다. 노동당은 농촌에서 집중적으로 표를 얻었는데 이는 민주화 바람이 농촌까지 미치지 못한 탓도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도입되면 농민들이 옛주인에게 토지를 빼앗길 것이라는 노동당의 선전술에 말려들었고, 갓 조직된 민주당이 농민을 설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노동당은 정권 재창출에는 성공했으나, 이후 사태를 수습하는데 실패했다. 노동당 정부는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했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알바니아인 5,000명이 이웃 그리스로 월경했고, 노동당 집권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파업이 확산되었다. 노동당은 구국위원회를 설치해 타협을 모색했지만 6개월만에 해체해야 했다.

1992322일에 다시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이 140석 가운데 92석을 차지해 압승했다. 알리아는 대통령직을 사퇴했다.

의회는 민주당의 베리야를 신임대통령으로, 알렉산더 멕시(Aleksandër Meksi)를 총리로 선출했다. 이로써 알바니아는 53년만에 처음으로 민주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1인 장기독재를 이어온 알바니아에서 유혈사태 없이 민주화가 이뤄진 것은 2대 서기장인 엘리아가 점진적인 민주화과정을 수용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앞서 루마니아에서 독재자가 처형된 선례가 알바니아에선 반면교사가 된 셈이다.

 


<침고자료>

Wikipedia, Enver Hoxha

Wikipedia, Fall of communism in Albania

Wikipedia, Albanian Civil War

Wikipedia, Sali Beri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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