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왕국…군사 요충지 사벌국
사라진 고대왕국…군사 요충지 사벌국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1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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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백제 사이에 오락가락하자 첨해왕 때 정벌…반란 일으키자 사도성으로 이주

 

사벌국은 경상북도 상주에 있던 소국이다. 사량벌국이라고도 했다. 삼국사기엔 사벌국에 관해 짤막하게 서술되어 있다.

첨해왕(沾解王)이 왕위에 있을 때, 예전부터 우리에게 속해 있던 사량벌국(沙梁伐國)이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붙으니,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열전 석우로조)

상주(尙州)는 첨해왕(沾解王) 때 사벌국(沙伐國)을 빼앗아 주()로 삼은 지방이다. 법흥왕 12(서기 525) ()나라 보통(普通) 6년에 처음으로 군주를 배치하여 상주라고 하다가 진흥왕 18(서기 557)에 주를 폐지하였다 (지리지 상주조)

 

상주 병풍산 고분군 /문화재청
상주 병풍산 고분군 /문화재청

 

사벌국 또는 사량벌국이 신라에 귀속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신라의 사벌국 정벌 기사는 신라본기에는 없고, 열전에 나와 있다. 첨해왕 때라고만 했다. 첨해왕 재위기간이 서기 247~261년 사이인데, 석우로가 죽은 해가 신라본기에는 249, 열전에는 253년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247~249년 사이에 사벌국은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상주는 교통의 요지다. 경상도에서 서울을 가려면 상주를 거쳐 충북 영동이나 괴산을 통해 간다. 또 백두대간을 넘으면 충북 보은, 부여, 공주로 이어져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백제를 공격할 때 길목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 경상도 명칭을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에서 따와 지은 것을 보아도 상주의 지리적 비중을 알수 있다.

삼국사기 석우로조에 사량벌국이 예전부터 신라에 속해 있었다는데, 갑자기 배반해 토벌했다는 기사가 핵심이다.

사벌국은 신라가 토벌하기 전에 독립을 유지한 채 복속관계, 즉 조공관계를 유지한 것 같다.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 세력을 강화하자 사벌국은 신라와 백제 사에 갈등을 했고, 백제에 붙기로 했을 것이다. 이에 신라는 느슨한 속국 관계를 청산하고 차제에 확실하게 점령해 내지화하자고 판단했다. 사벌국의 배신을 계기로 삼은 것이다. 첨해왕은 대장군 석우로를 시켜 사벌국을 토벌했다.

신라는 사벌국을 정벌한 후 상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했다. 진흥왕 13(552)에 군사조직으로 5주에 6()을 두어 상주정(尙州停)1개 군단을 설치햇고, 진덕여왕 2(648)에 김유신 장군을 상주행군 총관(摠管)으로 임명해 백제와의 싸움에 전방기지로 활용했다.

문무왕 13(673) 상주정을 귀당(貴幢)으로 승격 개편해 상주는 삼국통일 이후도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전)사벌왕릉 /문화재청
(전)사벌왕릉 /문화재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유례왕 10(293) 사도성(沙道城)을 개축해 사벌주의 부유한 백성(豪民) 80여 가구를 옮겨 살게 했다는 기사가 있다. 한해 전에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해 함락하자, 유례왕은 일길찬 대곡을 파견해 사도성을 되찾았다.

이 기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부유한 백성를 골라서 해안으로 이주시켰을까.

사도성은 동해안의 성()으로, 경북 영덕으로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성이 왜병의 침입으로 피폐해졌다면, 사벌주의 백성들을 데리고 가 농사도 짓게 하고 병력으로 충원했어야 한다. 하지만 신라가 사벌주의 부유한 백성만 이주시켰다. 이는 사벌주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부유한 백성 80가구는 사벌국의 귀족층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나라가 망한지 40년 후에 신라에 저항했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사벌국이 정벌된 이후 백제의 침공이 잦아진다. 첨해 9(255), 미추 5(266), 미추 17(278), 미추 22(283)에 백제가 신라를 쳐들어 온다. 이때 신라와 백제의 경계에 있던 사벌주에서 옛 귀족들 가운데 백제파가 신라에 등을 돌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신라가 사벌주 귀족 80여 가구를 멀리 동해안으로 이주시켰을 것이다.

신라는 정복지의 백성이 반란을 일으킬 때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사민(徙民) 정책을 취했다. 파사 23(102)에 항복한 실직국이 2년후에 배반하자 파사 임금은 토벌하고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기게 했다. 또 실직국과 같은 시기에 항복한 압독국이 일성 13(146)에 반란을 일으키자 평정하고 남쪽 지방으로 옮겼다. 사벌국 옛귀족들에게도 마찬가지 조치를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사벌왕릉 비각 /문화재청
(전)사벌왕릉 비각 /문화재청

 

상주에서는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 청동기시대 고인돌유적이 산재해 있다. BC 32세기의 세형동검(細形銅劍), 동모(銅鉾), 이형동기(異形銅器) 등 청동기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청동기시대부터 독자적인 정치집단이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사벌국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옛무덤이 있다.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에 있는 이 왕릉은 경상북도 기념물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사에 기록이 없어 누구의 묘인지 추정하기 어렵다. 신라 54대왕 경명왕의 다섯째 왕자 박언창의 묘라는 전설이 전하는데, 박언창은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되어 사벌국이라 칭하고 자립왕으로 11년간 다스리다 견훤의 침공으로 929년에 패망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삼층석탑 옆에 왕릉에 속한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석탑의 서북 편에는 상산박씨 문중에서 건립한 재실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옛 사벌국의 성이 병성산에 있고 이 성의 곁에 있는 언덕에 우뚝하게 솟은 고분이 있어 사벌왕릉이라 전해오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주시 병풍산(屛風山) 서북쪽 구릉에 고분군이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고분군은 사벌국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상주지역에서 형성범위나 규모가 가장 큰 무덤이다. 무덤이 있는 병풍산의 정상부에는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병풍산성이 축조되어 있어, 무덤을 만든 세력의 힘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아마도 그 세력은 사벌국의 중심세력이나 삼국시대 상주지역의 지방 유지세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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