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연방 해체의 진통…인종청소에 대살육전
유고연방 해체의 진통…인종청소에 대살육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5.0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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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⑫…극단적 민족주의가 초래한 대참사, 외톨이 된 세르비아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고위관료 숙청운동을 벌였다. 반관료혁명(Anti-bureaucratic revolution)이란 이름의 캠페인은 부패를 추방하는 일종의 정풍(整風)운동인데, 실제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걸림돌이 되는 당과 정부의 고위직을 제거하는 정략적 수단이었다.

먼저 걸려든 인물이 코소보의 아젬 블라시(Azem Vllasi) 대통령이었다. 블라시는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려는 세르비아의 시도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밀로셰비치의 하수인들은 온갖 책동을 벌여 1988년 그를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고분고분한 인물로 그 자리를 메웠다. 그 다음 타깃은 몬테네그로 공화국이었다. 몬테네그로 정부와 당은 세르비아주의자들의 공세에 반발했지만, 어쩔수 없이 대통령을 교체했다.

이렇게 해서 밀로셰비치는 유고연방의 집단대통령제 구성멤버 8명 가운데 세르비아, 코소보, 보이보디나, 몬테네그로의 4명을 확보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의 4표 가운데 하나만 반대 또는 기권의 이탈표를 유도하면, 연방은 밀로셰비치의 의도대로 움직일수 있었다.

밀로셰비치가 연방 권력을 장악하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언론들은 그를 이탈리아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에 비유하며 비난했고, 세르비아 언론들은 두 공화국 지도자를 반역자라고 공격하면서 언론을 통한 대리전이 펼쳐졌다.

 

지뢰에 파괴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세르비아 탱크 /위키피디아
지뢰에 파괴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세르비아 탱크 /위키피디아

 

밀로셰비치는 코소보에 연방군 투입을 밀어부쳤다. 19892월 코소보에는 광산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자치권 회복과 블리시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했다. 227일 코소보에 연방군 투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Milan Kučan) 대통령이 세르비아의 주장에 반대하며 자리를 박차고 돌아갔다. 쿠찬은 공화국내 야당지도자들을 불러 민주화를 약속하며 세르비아에 대항하기 위해 정파를 초월하는 단합을 이끌어 냈다.

연방수반을 맡고 있던 보스니아의 라이프 디즈다레비치(Raif Dizdarević) 대통령도 세르비아의 압력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오히려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시위대에 나가 유고연방의 단합을 호소하기도 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항의 시위를 하기 위해 떼를 지어 슬로베니아 행 열차를 탔으나, 보스니아 경계에서 저지당했다.

 

19901월에 열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산당 전당대회는 세르비아주의자와 반세르비아주의자의 대결의 장이었다. 세르비아측은 인구가 많기 때문에 11표의 투표를 하자고 주장했고, 다른 공화국들은 공화국의 분권을 요구했다. 양측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치했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대표들이 대회장을 떠나버렸다. 이후 북부 공화국의 공산당 분국들은 독자적인 당을 꾸리며 복수정당제도를 통해 집권하는 민주화의 길을 열게 된다.

1990년에 각 공화국에서 복수정당제를 통한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북부 공화국의 공산당은 사회민주당 등으로 당명을 고쳐 총선에 참가했다. 그 해 총선에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에선 공산당 계열이 참패하고, 독립 성향이 강한 우파 정당이 승리했다. 이에 비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는 공산당이 승리했다.

 

크로아티아 내의 크라이나 공화국 /위키피디아
크로아티아 내의 크라이나 공화국 /위키피디아

 

크로아티아에선 프라뇨 투지만( Franjo Tuđman)이 당선되었는데, 그는 밀로셰비치로부터 크로아티아를 보호하겠다고 공언했다. 크로아티아의 인구비중은 크로아티아인이 78%, 세르비아인이 12%였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가 집권하자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 거주지역은 크라이나(Krajina) 자치주를 결성하고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을 호소했다. 이에 세르비아의 국방장관 페타르 그라챠닌(Petar Gračanin)은 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약속했다. 크로아티아가 크라이나에 대해 무력 시위를 벌였지만, 세르비아가 조종하는 연방군이 이를 억제했다. 이후 크로아티아에서는 무장테러와 도로 봉쇄 등 종족간의 대결이 날로 격화되었다.

 

199012월 슬로베니아에선 독립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슬로베니아인들은 94.8%의 투표율에 88.5%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을 원했다.

1991년초, 슬로베니아의 주민투표에 힘입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에서도 주민투표가 논의되었다. 그해 3월 세르비아는 연방을 앞세워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시도했다. 공화국과 자치주의 대통령 8명이 모여 계엄령 선포를 의논한 자리에서 크로아티아를 비롯해 4명이 반대했다. 44의 대치 국면에서 밀로셰비치파로 분류되던 코소보 대통령이 배신하고 반대로 돌아섰다. 세르비아가 요구한 연방 계엄령은 무산되었다.

19915월 크로아티아 주민투표에서 세르비아인들이 불참한 가운데 투표자의 93.24%가 독립을 지지했다. 같은 시기에 크로아티아 내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 탈퇴를 선언,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의 스르프스카 공화국 /위키피디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의 스르프스카 공화국 /위키피디아

 

1991625,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2개 공화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다음날 아드리아 해상에 주둔하던 연방군이 슬로베니아를 침공했다. 이로부터 본격적인 유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마케도니아는 19919월에 주민투표를 실시해 95%의 찬성으로 독립을 선포했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19923월 주민투표를 거쳐 독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1991~1992년 사이에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한 6개 공화국 가운데 4곳이 독립했다. 유고연방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2개 공화국으로 위축되었다. (마케도니아는 2019년 북마케도니아로 국명을 바꿨다.)

 

사라예보의 정부청사가 세르비아인들의 포격에 불타고 있다. (1992) /위키피디아
사라예보의 정부청사가 세르비아인들의 포격에 불타고 있다. (1992) /위키피디아

 

내전은 잔혹했다. 슬로베니아는 세르비아인의 비중(2%)이 낮은데다 크로아티아가 가로막고 있어 세르비아가 일찍이 포기했다. 슬로베니아 전쟁은 열흘만에 끝났고(Ten-Day War), 사망자도 수십명에 그쳤다.

이에 비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선 세르비아인의 비중이 높아 내전이 1995년까지 4년간 진행되었다.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에선 크라이나 공화국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선 스르프스카(Srpska) 공화국을 각각 수립해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저항했다.

유고 내전은 대량학살, 인종청소, 인권말살, 집단강간 등의 전쟁범죄가 전개되는 잔혹함을 노출했다. 특히 19957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스레브레니차에서 세르비아인 정권이 무슬림 8,0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후에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되었다.

국제인권단체의 분석에 따르면 내전 기간에 옛 유고인들은 13~14만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념 때문에 싸운 것은 아니다. 종족과 언어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향해 무차별 살인을 용인했다. 한때 한 지붕 밑에 정을 나누던 사람들이 딴 살림을 차리겠다며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고 피를 흘려야 했다.

결국은 미국과 EU가 대량학살을 막기 위해 NATO를 동원해 세르비아를 폭격했다. 199511월 미국의 중재로 오하이오 데이튼에서 보스니아 전쟁의 당사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협정이 체결되어 내전이 종식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후 독립국 /위키피디아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후 독립국 /위키피디아

 

19982, 세르비아가 코소보 무장세력을 공격하면서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는 알바니아가 코소보 독립을 지지하면서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NATO는 코소보 독립을 지지하며 세르비아 주요도시를 공습함으로써 코소보 전쟁은 19996월에 종전했다.

마지막까지 연방을 유지하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도 갈라섰다. 몬테네그로도 20065월 주민투표를 통해 세르비아와의 분리를 결정했다. 세르비아내 코소보도 2008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과거 같으면 무력으로 제압했을 것이나, 미국과 EU가 눈을 치켜보고 있기 때문에 움츠리고 있을 뿐이다.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로 구성되었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7개 독립국으로 갈라졌고, 세르비아는 보이보디나 자치주만 끌어 안은 채 왜소해 졌다. ()세르비아주의를 주창하던 밀로셰비치는 20014월 세르비아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7월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송되어 전범으로 재판을 받던 중 2006311일 감옥에서 사망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Breakup of Yugoslavia

Wikipedia, Yugoslav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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