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으로 치달은 1997 알바니아 폰지사기사건
내전으로 치달은 1997 알바니아 폰지사기사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5.11 2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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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발생…인구 60%가 금융사기에 연루

 

폰지 사기란 20세기초 찰스 폰지(Charles Ponzi, 1882~1949)라는 유명한 사기꾼의 이름에서 따온 말로, 일종의 금융사기 수법이다. 투자자들에게 높은 배당이나 수익을 주겠다고 속이고 투자를 받아, 그 돈으로 또다른 투자자를 모은다. 먼저 투자한 사람들에게 약속한 배당이나 수익을 줄 때에는 투자이익금이 아니라, 나중에 투자한 사람들의 돈으로 지급한다. 이렇게 거액의 돈을 모아 먹고 튀는 사기 수법이다.

인구 280만명의 동유럽의 알바니아에서 1997년에 대형 폰지사건이 발생해 내전으로 치닫고 정권이 교체되고, 2,000명 이상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알바니아엔 1946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 엔버 호자(Enver Hozha)라는 독재자가 40년간 지배해왔다. 이 나라는 동유럽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1991년에 자유총선을 실시하고, 1992년에 민주정부가 수립되어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45년간 폐쇄경제를 운영해온 알바니아가 자본주의 개방경제를 운영하면서 고도의 성장을 구가했다. GDP 성장률이 1993년에 111%, 100489%, 1995년엔 119%를 달성했다. 경제규모가 1년에 두 배씩 확장하는 초유의 고도성장을 이룩했으므로, 이 나라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꿈의 낙원으로 여겨졌다. 워낙에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몇 년간의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1인당 소득이 유럽 평균의 30%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공산주의자에서 자본주의자로 변신한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금융규제란 개념이 없었다. 자본주의를 막 도입한 알바니아의 경제는 돈을 마음껏 굴리는 자유시장 그 자체였다.

 

이 은둔의 나라에 1991년에 다단계 폰지거래가 도입되었다. 처음 폰지거래를 연 사람은 하이딘 세이디세(Hajdin Sejdisë)란 인물이었고, 그 후 구두공장 노동자 출신의 수자(Sudja), 야당 정치인이 만든 포풀리(Populli) 등의 폰지회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폰지회사는 연간수익율을 기본적으로 10% 이상 보장했다. 월수익률 4~6%를 제공하는 곳도 있었고, 수자의 경우 연간 100% 수익률을 제시했다.

처음에는 폰지회사들이 투자자에게 수익을 지급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투자를 받아 먼저 투자한 사람에게 고수익을 돌려줬고, 또다른 투자자를 찾아 선투자자에게 이익금을 나눠주었다. 높은 수익률을 내는 대박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자본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 나라 국민들이 대거 폰지 거래에 뛰어 들었다. 어떤 이는 집을 팔아 투자했고, 그리스나 이탈리아에 가서 노동으로 번 돈이 폰지회사에 투자되었다.

 

사기꾼들은 투자자금을 모아 마약과 무기 거래에 나섰다. 이웃 유고슬라비아에선 내전이 벌어졌고, 동족인 코소보의 알바니아족 무장단체는 무기가 절실했다. 이들은 이탈리아 마피아와 코소보해방전선과 거래를 하면서 수익금을 거뒀다.

IMF1994년에 알바니아 폰지거래가 파산에 이를 가능성을 경고했으나, 금융당국은 폰지회사에 증거금을 요구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알바니아 금융감독당국자에게 규제라는 개념이 없었다. IMF1996년에 재차 폰지 사기의 위험성을 경고하자 그제서야 금융당국이 규제를 검토했는데, 그땐 이미 문제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거래가 정점에 달했을 때에 알바니아 인구의 60%에 달하는 200만명이 폰지 회사에 투자했고, 그 금액은 12억 달러에 달했다. 알바니아 인구 1인당 400달러가 폰지거래에 물렸다.

 

19971월에 모든 투자자에게 연간 30~100%의 수익금을 돌려주는 것이 한계에 봉착했다. 마약과 무기 거래 자금이 회전하지 않았고, 투자자 모집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해 18~16일 사이에 폰지 회사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했고, 122일에 대형 펀지회사인 사페리와 포퓰리 등 대형 폰지회사가 파산 위기에 몰렸다.

 

무기를 탈취한 알바니아 시위대 /위키피디아
무기를 탈취한 알바니아 시위대 /위키피디아

 

투자자들의 최초 항의시위가 116일 남부지역에서 발생했고, 119일엔 수도 티라나에서 대형 폰지회사 수자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24일 돈이 떼인 폰지 투자자들은 폭도로 변했다. 수천명의 시위자들이 남부 도시 루슈녀 시청으로 행진했다. 그들은 정부가 폰지사기를 방조했다고 주장하며 원금을 변제해줄 것을 요구했다.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 시청을 불살랐다. 이튿날 정부는 집권 민주당 의장을 루슈녀에 파견했지만 오히려 시위대에 감금당했다.

알바니아 북부는 민주당 지역, 남부는 공산당에서 변신한 사회당 지지 지역이어서 지역간 대립의 양상을 띠었다.

227일에는 시위대가 정부청사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경찰관 6, 시위대 3명이 사망하게 되었다. 남부지역이 폭도화하면서 알바니아 정부는 북부지역 주민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무장 시위대는 무기고를 습격해 본격적인 내전 상황에 돌입했다.

32일 알렉산더 멕시(Aleksandër Meksi) 총리가 사임하고, 살리 베리샤(Sali Berisha) 대통령은 국가긴급사태를 발동했다. 미국, 이탈리아, 독일 등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긴급공수작전을 폈다.

결국 내전은 유엔 평화유지군의 개입에 의해 진정되었다. 유엔 결의에 의해 이탈리아군을 중심으로 다국적군 7,000명이 알바니아에 투입되면서 양측간의 무장시위는 진압되었다.

사태가 수습된 후 베리샤 대통령은 사임하고,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내전 과정에서 유출된 무기는 코소보해방전선에 공급되어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격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알바니아 내전 당시 미군의 자국민 소개작전(1997년 3월) /위키피디아
알바니아 내전 당시 미군의 자국민 소개작전(1997년 3월) /위키피디아

 

거국적인 폰지사기를 겪은후 알바니아 경제는 급격하게 침체했다. 1997년 통화(lek)의 가치는 절반으로 평가절하되었고, 그해 경제는 0.08% 하강했다.

알바니아 폰지사기 사건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규제되지 않은 시장경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1998년 가을 러시아도 국가모라토리엄을 겪었다. 시장경제 이행과정의 딸꾹질이 치명적이란 사실을 입증한 사건들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Pyramid schemes in Albania

Wikipedia, Albanian Civil War

Wikipedia, Economy of Albania

IMF, The Rise and Fall of Albania's Pyramid Sche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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