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경제기적, 잿더미 위에서 불사조처럼 회생
서독의 경제기적, 잿더미 위에서 불사조처럼 회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5.1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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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분단③…’사회적 시장경제‘ 도입, 화폐와 세제개혁, 고도의 기술력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산업시설을 파괴하고, 대량의 인명을 앗아간다. 게다가 기존의 질서도 무너뜨린다. 특히 패전국은 승전국에게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는 거서은 물론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다. 따라서 인류역사상 수많은 전쟁에서 국가가 사라지고 인종이 소멸했다.

하지만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난 나라가 있다. 2차 대전후 독일과 일본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연구한 경제 이론을 불사조 효과’(pheonix effect)라고 한다. 이 이론은 미국의 오건스키(A.F. Organski)가 주창하고, 우리나라에선 서울공대 김태유교수가 지지했다.

불사조 효과이론에 따르면 전쟁으로 기존의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기성 정치질서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산업과 기술이 태동할 여건이 갖춰진다. 대량의 실업자로 인해 값싼 노동력이 넘쳐난다. 전쟁을 통해 고도의 기술이 축적되어 있다. 전후 과도기가 지나고, 일정한 자본축적의 기회가 생기면 패전국은 고도의 성장을 달성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함정을 가지고 있다. 모든 패전국이 전후 복구과정에서 경제 기적을 이룩하진 못했다. 대다수 패전국은 영락하기 십상이었고, 소수의 나라만이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이 이론은 그 소수를 설명하는 이론에 불과하다.

 

2차 대전 종전후 고국으로 돌아온 해외거주 독일인들 /위키피디아
2차 대전 종전후 고국으로 돌아온 해외거주 독일인들 /위키피디아

 

어쨌든 서방 3국이 점령한 서부 독일은 불사조처럼 일어났다. 서독의 공업생산 성장률은 195025.0%, 195118.1%를 기록했고, 다소의 진폭이 있었지만 이런 고도성장은 1950년대를 관통했다. 1960년 서독의 공업생산력은 1950년의 2.5배로 커졌고, GDP 규모도 70% 성장했다. 고용인원은 19501,380만명에서 19601,980만명으로 증가했으며, 이 기간에 실업률은 10.3%에서 1.2%로 급락했다.

종전 직후 피죽도 끓여 먹지 못하던 서독인의 경제적 발전의 혜택을 받았다. 1940~1955년 사이에 평균 임금이 80% 상승했고, 사회복지제도도 크게 향상되었다. 영국의 더타임스는 독일의 경이로운 경제발전을 다루면서 라인강의 기적’(Miracle on the Rhine)이라는 헤드라인을 달았다. 독일인들은 이를 경제의 기적‘(Wirtschaftswunder)이라고 표현했다.

서독의 높은 성장률은 1960년대에 다소 둔화되었지만 지속되었고, 1970년대 오일쇼크 때까지 이어졌다. 패전국이었던 독일이 유럽 무대, 나아가 세계 무대에서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낸 것도 이같은 경제발전의 결과다. 1990년대 독일 재통일, 유럽 통합에 서독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경제기적을 통해 형성된 탄탄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이에 비해 전승국인 영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보장하는 과도한 복지제도로 재정적자가 누적되면서 극심한 침체에 빠졌다. 한때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던 대영제국은 1976년에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고, 1970년대말엔 청소용역업체가 파업을 벌여 런던시내가 쓰레기 더미로 뒤덥히는 나라로 전락했다. 미국도 베트남전의 늪에 빠져 1970년대에 무역과 재정의 쌍둥이 적자에 허우적거렸다.

이와 달리, 패전국 독일, 정확하게는 서독 경제는 부활했다. 처음에는 전승국의 경제적 도움을 받았지만, 1970년대엔 오히려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전승국을 제쳤다.

 

전후 독일의 경제기적을 상징하는 폴크스바겐의 딱정벌레차(Beetle) /위키피디아
전후 독일의 경제기적을 상징하는 폴크스바겐의 딱정벌레차(Beetle) /위키피디아

 

서독의 부활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독이 냉전의 수혜국이란 사실이다. 서독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경제권에 편입되어 성장의 혜택을 보았다.

베를린 봉쇄가 진행되던 1948~1949년만 해도 독일 경제는 희망이 없었다. 1949~1950년 겨울에 서독은 최고의 실업률을 기록했고, 독일인들은 식량배급으로 간신히 연명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큰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독일에 주문했다. 독일의 기술력은 뛰어났고, 기술자들도 풍부했다. 그 열매는 일본에 상당수 돌아갔지만, 서독에도 배분되었다.

그 당시 서독은 미국이 제공하는 마샬플랜에 의해 14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받았다. 이 돈이 제조업 부활의 씨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서독의 초기 자본 형성에 미군 주둔비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군은 서독에 25만명이 주둔했는데, 그 비용이 연간 24억 달러에 달했고, 마샬플랜 차관보다 많았다. 미군 주둔비용은 독일 땅에 스며들어 산업자본 형성에 기여했다.

해외에서 강제로 이주해온 독일인, 동독 이주자, 석방 포로가 1,650만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들이 거의 모두 경제활동에 참여하면서 실업률이 완전고용 상태인 1% 이하로 떨어졌다.

이에 비해 동독은 정체되었다. 소련은 물적 지원은커녕 지속적으로 동독에서 전쟁배상금 조로 재원을 뜯어간데다 관료주의와 서독으로의 인력 이탈로 서독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낙후했다.

 

발터 오이켄과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위키피디아
발터 오이켄과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위키피디아

 

서독에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주역으로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과 루드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를 꼽을수 있다.

오이켄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루돌프 오이켄의 아들로, 히틀러 시절에 나치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프라이트 학파(Freiburg school)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오르도자유주의(ordoliberalism)의 창시자다. 오르도(Ordo)란 경제학술지를 통해 정리된 이 경제이론은 사회적 시장경제론‘(social market economy)으로 정착되었다.

이론은 정부가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것을 골격으로 한다. 다만, 기업이 독점화할 경우 자유시장의 이득을 탈취하므로, 정부가 카르텔과 같은 독점 자본의 시장 장악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자유방임주의와 차별화된다. 오르도자유주의는 자유시장을 존중하되 공정거래를 강화하는 내용으로, 사회주의적 경제 처방이 지배하던 당시로는 파격적이었다.

오이켄은 또 독립적이고 강력한 중앙은행을 지지했다. 오이켄의 주장은 1949년에 집권한 기민당의 경제장관 에르하르트에 영향을 주었고, 1957년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Bundesbank) 설립에 이론적 토대를 형성했다.

 

에르하르트는 1949~1963년 사이 14년간 부총리겸 경제장관을 수행한 후 콘라트 아데나워를 이어 총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경제장관과 총리를 역임하는 기간에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을 달성했다.

에르하르트는 나치 정권이 극에 달하던 1942년에 독일의 패전을 예측하고 전후 경제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지를 연구했다. 이런 사실이 미군 첩보기관에 잡혔고, 미 군정당국은 그에게 인플레이션을 잡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주문했다.

에르하르트는 도이체마르크라는 신화폐의 발행을 주장했고, 미군정은 이를 받아들였다. 1948년 화폐개혁 시행 직전에 미군정 사령관 루시어스 클레이(Lucius Clay)이 그를 불러 반대여론이 많다고 지적하자, 에르하르트는 내 주변에도 반대자가 있다, 나를 믿어 보시라고 대답했다. 1948621일 화폐개혁이 단행되고 인플레이션은 거짓말처럼 통제되었고, 암시장이 사라졌다. 그의 처방이 옳았던 것이다.

그는 1949년 아데나워 초대 총리 아래서 경제를 총괄하며 경제기적을 이루었다. 그의 처방 중 하나는 소득세 기준을 대폭 내린 것이었다. 그는 6,000 마르크 이상에게 95%의 세율을 적용하던 것을 25만 마르크 이상으로 대폭 조정했다. 한계소득세율을 85%에서 15%로 인하했다. 중산층에게 소득세를 대폭 감면해 줌으로써 소비에 활력을 올리자는 취지였고, 그 정책은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독일은 전쟁 이전부터 높은 수준의 기술을 확보했고, 유능한 기술자를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 이런 바탕에서 경제가 재건될 때 경쟁국보다 우수한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독일인들의 근면성, 높은 저축률 등도 라인강의 기적의 또다른 요소가 되었다.

 


<참고자료>

Investopedia, The German Economic Miracle

Wikipedia, Economic history of Germany

Wikipedia, Wirtschaftswunder

Wikipedia, Ludwig Erhard

Wikipedia, Walter Euc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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