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정부, 민주화 조건으로 동독에 경제 지원
서독 정부, 민주화 조건으로 동독에 경제 지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5.1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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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①…동독, 경제 파산 직전에 서독에 손내밀어…서독, 민주화 요구

 

동독은 공산권 국가 가운데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동독의 산업기술력은 동유럽 어느 나라보다 뛰어났고, 독일인 전통의 근면성과 근검절약 기질이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게다가 독일은 카를 마르크스의 고향이자, 러시아혁명 이전에 유럽 사회주의 본산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독의 사회주의 실천은 모범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 평가는 공산권에서만 한정되었다.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온 유럽이나, 같은 민족인 서독에 비해서 동독의 경제성적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제점을 받았다.

1980년대말, 동독의 40년간 공산주의 실험은 심각한 상태에 처했다. 동독 공장의 대부분은 폐허 수준이었고, 기계는 완전 구형이고 폐기 직전 상태로 낡아 있었다. 건물과 교통 인프라, 통신 부문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제조업 생산력은 서독의 25~30% 수준에 머물렀다. 많은 제품들은 동독 내부나 공산 국가에서만 팔렸다. 패망 직전에 동독의 1인당 구매력은 서독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동독과 서독의 1인당 소득 추이 /Intereconomics
동독과 서독의 1인당 소득 추이 /Intereconomics

 

1990년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가장 큰 요인이 미하일 고르바쵸프 소련 서기장의 개혁-개방정책이었음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동독의 공산주의 실험이 성공해 서독보다 잘 살았으면, 동독인들이 스스로 나라를 무너뜨렸을 리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독인들은 서독인에 비해 절대적 열등감에 사로잡혔고, 그들의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 하나는 동독에서 탈출, 서독으로 가는 것이고, 둘째는 동독 정권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소극적 저항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 저항이었다. 두 저항이 소용돌이 치면서 동독인들은 공산 정권을 붕괴시키고 서독과 합병을 선택한 것이다.

 

동서독의 경제적 격차는 연합군 점령 때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은 1948년부터 마샬 플랜의 일환으로 서독지역에 14억 달러 가량의 경제적 원조를 제공한 반면에 소련은 1953년 스탈린 사망 때까지 전쟁배상금 조로 동독을 수탈했다. 소련이 중화학공업 시설을 뜯어가고 군대주둔 비용을 부과시키는 등을 통해 1946~1953년 사이에 동독에서 직간접적으로 받아간 돈이 140억 달러어치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에 농업 집단화와 공장 국영화 과정에서 수백만명의 동독인, 특히 젊은이들이 서독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동독은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1963년 발터 울브리히트 당서기장은 신경제시스템(New Economic System)을 채택해 중앙통제경제를 완화하고 부문별 자율성을 주었으며, 시장경제 요소를 확산시켜 경제에 활력을 일으키려고 했다. 신경제시스템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낳지 못했지만 반도체를 비롯해 하이테크 분야의 성장을 이끌었다.

1971년 울브리히트가 실각하고,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가 당서기장이 되면서, 동독 경제는 다시 마르크스-레닌주의 원론으로 돌아갔다. 호네커는 국제적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생산부문별로 주요 과업(Main Task)을 부과하며 중앙집중적 경제를 강화했다.

호네커는 동독인민들의 주거생활을 개선하는데 나름 많은 재원을 투입했다. 주택을 신축하고, 아파트를 개축하며, 렌트비용에 보조금을 주었다. 여성근로자들이 편하게 일하도록 보육원과 유치원을 증설하고 워킹맘에게 육아휴가 6개월을 보장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호네커 정권은 서독과의 경쟁심에서 인민을 위한 복지비용을 늘렸지만, 경화(硬化)가 부족했다. 동독인들의 소비가 증가하면서 소비재의 수요도 늘어났다. 중화학공업 위주의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소비재가 부족했고, 부족분을 수입으로 채웠다. 수입품의 부족으로 생긴 사태가 1976~1977년의 이른바 동독 커피파동이다.

 

1977년 커피파동 때의 커피 믹스 /위키피디아
1977년 커피파동 때의 커피 믹스 /위키피디아

 

독일인들은 커피를 즐긴다. 동독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값비싼 커피를 좋아했고, 커피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동독 사람들의 커피 비용은 가구비와 대등하고, 신발 비용의 절반 정도에 해당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1976년 커피 주요생산국인 브라질의 작황 부진으로 커피 가격이 4~5배 폭등했다. 동독의 연간 커피 수입 금액이 15,000억 마르크에서 7억 마르크(서독화폐기준)로 불어났다. 그 시기는 오일쇼크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국제유가 등 해외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는 바람에 무역적자가 가중되고, 가뜩이나 경화가 부족한 상태에서 커피 수입액이 몇배로 늘어났다.

호네커 정권은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사치재의 수입을 제한했다. 커피도 포함되었다. 동독정권은 인민의 기호품을 공급하는 방안으로 커피믹스를 개발했다. 새로 보급된 커피믹스는 커피 51%에 치커리, 라이보리, 사탕수수가루 등을 49% 섞은 것이다. 커피에 민감한 동독인들은 정부의 조치에 불만을 품었지만 맛없는 커피믹스로 때워야 했다.

동독정권은 저렴한 커피 수입을 위해 외교채널을 가동해 베트남 커피를 수입했다. 베트남 커피는 에티오피아나 브라질 커피에 비해 맛은 떨어졌지만 그나마 커피믹스보다 나았다. 몇해가 지나고 국제커피가격이 떨어지면서 커피파동은 사그라들었다.

 

동독의 냉장고 제조라인(1964) /위키피디아
동독의 냉장고 제조라인(1964) /위키피디아

 

1980년대 들어 생활필수품 부족 현상이 악화했다. 막대한 군사비와 거대한 행정 경비의 부담으로 인민에게 돌아갈 복지비용의 여력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종주국인 소련도 경제가 어려워 지면서 동독에 싸게 지원하던 에너지 등 원자재 공급을 줄였다. 국가부채는 늘어났고, 투자자금은 날로 부족해졌다.

1982년에 폴란드, 루마니아가 재정위기에 몰리면서 서유럽 은행들이 동유럽에 대한 차관지원을 거부하는 사태가 빚어졌고, 동독의 재정 상태도 악화되었다. 동독은 서독에 차관지원을 요청했지만 서독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의 기민당 정부는 동독의 민주화와 연계해 자금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1983년 바이에른주의 총리 프란츠 스트라우스Franz Josef Strauß)30억 서독마르크를 지원함으로써 동독은 위기에서 탈출할수 있었다. 스트라우스의 조치는 동독의 파산을 유도해 권력붕괴를 추구했던 기민당-기사련(CSU-CDU)의 비판을 받았다.

 

1980년대 후반, 동독 경제는 사실상 파산 상태였다. 공산정권이 그 사실을 감추고 있었을 뿐이다. 호네커 정권은 경제를 개혁할 능력도, 의지도 부족했다. 동독 경제의 토대가 무너졌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조치의 영향으로 동독인들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거리로 나섰고, '노이에스포룸' '데모크라티 예츠트' '민주약진' 같은 정당이나 정치조직이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198910월 호네커가 실각하고 당내 2인자였던 에곤 크렌츠(Egon Krenz)가 신임 서기장이 되었다. 크렌츠는 경제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에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1965년 이래 24년간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에 재임하며 동독 경제를 주물렀던 게르하르트 쉬러(Gerhard Schürer)가 신임 서기장에게 솔직하게 나라의 재정상태를 보고했다. 68세의 이 노경제학자는 보고서에서 동독 경제가 파산 직전의 상태라며, “동독이 현재의 국가 부채를 유지하기만 해도 국민의 생활수준이 25% 하락하며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쉬러의 보고서(Schürer-Papier)에는 동독의 국가부채는 490억 서독마르크(260억 달러)에 이르며, 소련이나 서독의 지원이 없으면, 나라가 파산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소련은 동독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고, 손내밀 곳은 서독밖에 없었다. 동독 정부가 이 사실을 발표한 것은 처음이었고, 경제가 파산상태라는 정보를 들은 동독 주민들의 저항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동독과 서독의 1인당 GDP 성장률 비교 /위키피디아
동독과 서독의 1인당 GDP 성장률 비교 /위키피디아

 

크란츠 정권은 서독의 콜 총리에게 100억 마르크의 자금을 즉각 지원하고, 매년 20억 마르크씩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서독 정부는 경제 지원을 약속해 줄 터이니, 전력 공급 독점권을 포기하고, 민주주의 정당과 자유선거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돈은 주는 조건으로 동독의 민주화를 압박한 것이었다.

크란츠 정권은 서독으로부터 경제지원을 약속받는 대가로 새로운 여행법을 내놨다. 하지만 여행법은 사태를 진정시키기는커녕 악화시킬 뿐이었다. 서독은 재정위기에 봉착한 동독을 압박하면서 동독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1990년 독일의 통일은 파산한 동독 경제를 서독과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참고자료>

NYT, East Germany Losing Its Edge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Before Strauß: The East German Struggle to Avoid Bankruptcy During the Debt Crisis Revisited"

Wikipedia, Economy of East Germany

Wikipedia, East German coffee crisis

Wikipedia, Gerhard Schü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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