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천년 전에 벌어진 아랍-중국 무역전쟁
아편전쟁 천년 전에 벌어진 아랍-중국 무역전쟁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5.18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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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아랍인 폭동으로 표출…8세기에 아랍인 수십만명, 중국에 거주

 

1839년 아편전쟁은 서양세력이 중국에 무역개방하면서 일어난 전쟁이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마약의 일종인 아편을 거래했고, 중국 청조(淸朝)가 마약무역을 단속하다가 영국의 반격으로 일어난 더러운 전쟁이다.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서양과 동양의 패권전쟁으로 기록한다.

그에 앞서 1,100년전에 광저우에서 동양과 서양의 무역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 시대였고, 서쪽 상대는 아랍상인이었다.

 

1930년대 광저우 /위키피디아
1930년대 광저우 /위키피디아

 

때는 안록산·사사명의 반란이 일어나 양귀비(楊貴妃)의 품에 빠져 있던 당()의 현종이 서쪽 성도(成都)로 쫓겨나고 그의 아들이 황제에 올랐으니, 당 숙종(肅宗)이다. 당시 신라 임금은 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이었다.

당 숙종 3년인 758, 중국 남쪽 해안도시 광저우(廣州). 지금 광저우, 홍콩, 마카우, 선천이 위치한 지역으로 당나라 때에도 해양무역도시였다. 이곳에는 당나라 상인은 물론 사라센과 페르시아의 상인, 유태인 상인이 몰려와 상업과 무역활동을 했다. 아랍인들은 마을을 형성해 집단으로 몰려 살았다.

분쟁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중국과 아랍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시에도 당나라 관헌과 아랍상인 사이에 분쟁이 있었을 것이다.

1030일 대식국(大食國, 사라센)과 페르시아 사람들이 광저우시를 약탈하고 바다로 도망쳤다. 중국과 아랍인의 기록이 일치한다. 그해는 계사(癸巳)년이었다. 음력으로는 9월이었다. 중국 사서에는 大食波斯寇廣州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라센과 페르시아가 광저우를 약탈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이때 광저우를 약탈한 아랍과 페르시아인들이 중동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근 하이난섬(海南道)에 체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 당나라는 절도사들이 지방군벌을 형성하고 있어 해남도에는 중앙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약탈자들은 바다로 도망쳐 해남도에서 해적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 숙종은 분노했다고 한다. 하지만 힘이 미치지 않으니 어쩔수 없었다.

 

당의 황제를 대신해 아랍과 페르시이안들에게 복수를 한 사람은 전신공(田神功)이라는 지방군벌이었다. 그는 당의 중앙조정에 저항하던 인물인데, 양쯔강(揚子江) 어귀의 무역도시 양저우(揚州)를 쳐들어가 그곳에 있던 대식국과 페르시아인들을 수천명 학살했다. 광저우 학살이 발생한지 2년후인 서기 760년의 일이다.

중국 기록에는 大食波斯賈胡死者數千人”(대식과 페르시아 상인 수천명이 죽었다), “殺商胡波斯數千人”(상인과 페르시아인 수천명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다.

광저우와 양저우는 거리가 멀다. 광저우는 중국 남해안의 도시이고, 양저우는 동해안의 도시다. 아랍과 페르시아 무역상들이 당나라 때 중국 연안에 주거지를 만들어 크게 무역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수천명이 살해되었다는 기록에서 그들의 인구를 가늠케 한다.

 

황소의 난 행로 /위키피디아
황소의 난 행로 /위키피디아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복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는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가 아랍인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황소는 소금 밀무역업자였다. 당시 소금산업은 정부가 주도했기 때문에 비쌌고, 세금도 과도했다. 이에 황소 일당은 소금을 밀무역하면서 소비자들에게 반값으로 거래했다. 당 조정이 소금 밀매업자를 색출하면서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이 당 말기에 일어난 황소의 난이다.

반란군은 879년 중국 남부 무역도시 광저우를 기습했다. 그곳에서는 중국이 대란에 빠져 있는 틈을 타서 대식국과 페르시이인들이 다시 활약하고 있었다. 황소군은 이들을 약탈하고 살해했다. 이때 살해된 사람은 페르시아 이슬림교도, 아랍의 이슬람교도, 유태교도,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도들이었다. 수천명이 살상되었다. 1859년 미국 선교단이 이때 황소군의 공격으로 죽은 사람의 수를 12만명으로 추정했다. 또다른 연구자는 사망자가 12~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황소의 군대는 뽕나무 밭도 파헤쳤다고 한다. 이미 이때 중국 남부에서 비단 가공업이 상당히 크게 번성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고대에 중국 변방지역에 20만명의 외국인이 거주했다는 사실은 엄청나게 큰 상업도시가 형성되었음을 추측게 된다.

후에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동양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지만, 그에 앞서 천여년 전에 아시아의 양 끝의 나라들은 거대한 무역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역인 얼굴을 한 경주 괘릉 무인석 /사진=박차영
서역인 얼굴을 한 경주 괘릉 무인석 /사진=박차영

 

경주 괘릉(掛陵)에 가면 서역인 모습을 한 무인상이 서 있다. 이 무덤이 원성왕(재위 785798)의 것이라고 한다. 괘릉 석상의 얼굴이 누구인가엔 해석이 분분하다. 페르시아인이라는 설도 있고,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이라는 설도 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 수십만명이 거주하는 아랍인촌이 중국 해안에 건설되어 있었으니, 괘릉의 얼굴이 누구인이든 간에, 그들이 한반도에 건너와 무역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측해도 지나친 상상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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