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로사 형제①…아프리카 해적왕국 건설
바르바로사 형제①…아프리카 해적왕국 건설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1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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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 모두 해적에 참여…우르지, 알제리 점령해 오스만투르크에 상납

 

지중해를 헤집고 다닌 이슬람 해적들 가운데 16세기 전반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바르바로사(Barbarossa) 형제들을 빼놓을수 없다. 이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원을 받아 유럽 기독교 지역을 약탈했고, 형제들 가운데 하이르 앗딘(Hayreddin)은 오스만투르크의 해군 총사령관에 오르기도 했다.

 

바르바로사 형제들의 태생이나, 형제의 서열에 관해 견해가 분분하다. 아버지 야쿠프(Yakup)는 그리스 레스보스(Lesbos island) 섬을 거점으로 국제무역을 하던 상인이었다. 아버지가 기독교도였다는 설도 있고, 원래가 이슬람교도였다는 설도 있다. 야쿠프가 장사를 하기 앞서 1462년에 오스만투르크는 대군을 이끌고 비잔틴 제국에 속한 레스보스 섬을 정복했기 때문에 그가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보는 옳을 것이다.

아들 형제는 이샤크(İshak)가 장남이고, 우르지(Oruç), 하이르 앗딘, 일야스(İlyas)의 순서라는 게 대체적 견해인데, ‘해적의 세계사를 쓴 일본인 작가 모모이 지로는 일야스가 장남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당대 유럽과 아랍세계에 이름을 떨친 두 형제 가운데 우르지가 형이고, 하이르 앗딘이 동생이었음은 분명하다.

우르지와 하이르 앗딘은 수염을 붉게 물들였기 때문에 이탈리어어로 붉은 수염이라는 의미의 바르바로사(Barbarossa) 형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형제들은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배를 탔기 때문에 행해술과 뱃일을 잘 알았으며,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아랍어에 능통했다.

가장 먼저 해적질에 뛰어든 형제는 우르지와 일야스였다. 둘은 통상적인 무역을 하는 것보다 해적이 더 큰 돈을 벌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형제는 세 번째 항해를 나섰을 때, 그리스 해상의 로도스 섬(Rodos Island)의 거점을 둔 기독교 요한 기사단의 공격을 받아 전투를 벌였다. 전투 도중에 일야스는 목숨을 잃었고, 우르지는 레바논 보드룸(Bodrum)에 있는 요한기사단 성채에 갇혔다.

아버지 사업을 도와주던 동생 하이르 앗딘은 기독교도 상인들에게 연줄을 대 몸값을 지불할 터이니 형을 풀어주도록 부탁했다. 그 소식을 들은 우르지는 자신이 알아서 할 터이니, 몸값 협상을 하지 말라고 했다. 우르지는 3년간 보드룸 성채에 갇혀 있다가 탈출에 성공했다.

 

바바로사 형제들. 왼쪽이 형 우르지, 오른쪽이 동생 하이르 앗딘 /위키피디아
바바로사 형제들. 왼쪽이 형 우르지, 오른쪽이 동생 하이르 앗딘 /위키피디아

 

우르지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다시 해적활동을 시작했고, 동생 하이르 앗딘이 합류했다.

1504년 우르지 형제는 북아프리크 튀니지를 지배하던 하이프 왕조와 협상을 벌여 라굴레트(La Goulette) 항구 출입 허가를 받았다. 조건은 약탈품의 3분의 1을 주는 조건이었다. 형제는 라굴레트 항구를 거점으로 해서 유럽 해안을 사냥하러 출몰했다. 이들은 이탈리아 엘바섬(후에 나폴레옹이 유배된 섬) 근해에서 교황이 소유한 대형 갤리선 두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 스페인과 이탈리아 해안을 돌아다니며 재물을 취하고 사람을 납치해 아프리카로 데리고 갔다.

1509년에는 남은 형제 이샤크도 합류했다. 세 형제는 아랍 세계에 명성을 떨쳤고, 유럽 기독교 국가에는 두려움의 존재로 알려졌다.

이 무렵 포르쿠갈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열고,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 개척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지중해에는 이슬람 해적들이 준동했다. 당대 최강이었던 스페인은 이슬람 해적을 저지하기 위해 아프리카 주요항구마다 요새를 구축하며 그들의 이동을 방해했다.

1512년 우르지와 앗딘은 알제리의 이슬람 통치자의 지원을 받아 소형 갤래선 12척으로 알제리 연안에 구축된 스페인 요새 베자이아를 공격했다. 8일 간에 걸친 공방전이 벌어졌다. 우르지는 스페인 병사가 쏜 총탄에 쓰러졌고, 해적들은 튀니지로 퇴각했다. 우르지는 그때 한쪽 팔을 잃고 선단의 절반을 빼앗겼지만, 상처가 낫자 다시 해적질에 나섰다.

 

우르지가 갤리선을 나포하고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우르지가 갤리선을 나포하고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1516년 알제리 왕의 요청으로 세 형제는 다시 스페인 요새 베자이아를 공격하러 나섰다. 하지만 형제들은 자기네 해적들을 선봉에 내세우고 뒤에 빠져 있는 알제리 왕 살림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페인에 맞서기 앞서 알제리의 수도 알제를 공격해 왕을 죽이고 도시를 함락했다. 해적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죽은 알제리 왕의 아들은 스페인군 주둔지로 도망가 스페인의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다.

형제는 곧이어 틀렘센(현재 알제리의 도시)을 함락해 그곳의 왕위도 찬탈했다. 이젠 해적이 아니라, 어엿한 군조로서 유럽의 약탈자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우르지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쫓겨난 무어인들을 이주시켜 바바(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으며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스스로 알제리 술탄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스페인이 공격할 태세를 보이자, 우르자는 알제리 술탄직을 오스만투르크 술탄에게 바치고, 신하로 들어갔다. 오스만은 가만히 앉아서 북아프리카 영토를 얻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북아프리카가 오스만의 영토가 된다. 오스만의 술탄 셀림 1세는 우르지에게 알제리 총독의 자리를 내렸다.

 

서지중해 주변. /시오노 나나미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서 캡쳐
서지중해 주변. /시오노 나나미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서 캡쳐

 

곧이어 스페인이 반격에 나섰다. 1518년 스페인은 서유럽의 기독교 연합군 1만명을 이끌고 북아프리카를 쳐들어 왔다. 이 전투에 스페인 황제 카를로스 1세가 직접 참전했고, 총사령관은 이탈리아 제노바의 백전 노장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 제독이 맡았다. 이슬람 해적들은 알제리 오랑(Oran)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기독교군에 맞서 20일간 버텼다.

우르지는 트렘센에서 가져온 재물을 마구 뿌리며 스페인군의 주위를 흩트리려 했지만, 적은 일사분란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우르지는 더 이상 도망갈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남은 한 팔로 스페인 병사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또다른 형제 이샤크도 황천길로 가고 말았다.

이제 4형제 중 하이르 앗딘만 남았다. 하이르 앗딘은 알제리 총독과 북아프리카 해적 두목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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