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공산정권의 최후 몸부림…자유총선서 대패
동독 공산정권의 최후 몸부림…자유총선서 대패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5.2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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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⑤…동독 원탁회의 개최, 3월 18일 총선서 기민당 압승

 

19891110일 베를린 장벽 붕괴는 동독은 물론 서독 정부에도 큰 충격이었다.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동독의 파멸을 예상했지만 너무나 갑작스럽게 다가온 것에 당황했고, 동독 공산당(사회주의통일당)은 충격에 빠졌다.

서독의 콜 총리는 19899월 동독의 민주화시위가 급격하게 전개되자, 통일의 기회도 당겨질 것으로 예견했다. 그는 장벽이 허물어진지 3주째 되던 1128일에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했다. 그의 계획은 동독이나 연합국 4개국과 논의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독일에는 통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2차 대전 패전국이란 자책감에다 4대 강국의 눈초리를 의식해야 했기 때문이다. 슈피겔지는 전환기(die Wende)란 용어를 썼고, 서독 정치인들도 그 용어를 따라 썼다.

서독 내에는 동독의 존속을 희망하는 지식인들이 많았다. 외무장관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는 독일 국민들 사이에 통일 논의가 일어나는 것을 잠재우려고 했다. 독일 통일을 싫어하는 영국과 프랑스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동독의 민주화 세력도 통일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동독의 민주주의 지금’(Democracy Now), ‘민주혁신’(Democratic Awakening) 등 자생적 민주정당은 동독의 해방을 원했지 통일까지는 요구하지 않았다. 동독 민주세력 가운데는 동독이 서독과는 별개의 주권국가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동독인 다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점차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슬로건을 지지하게 되었고, 통일이 되면 잘사는 서독이 자신들을 구제할 것이라 믿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콜 총리는 통일을 역설했다. 그가 밝힌 10개항 계획은 통일 의지를 명확하게 표시한 것이었다.

 

1989년 12월 22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한스 모드로 동독 총리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개방식에 참석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89년 12월 22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한스 모드로 동독 총리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개방식에 참석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동독 정권은 이대로 가다간 정권 자체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 하며, 뒤늦게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베를린 장벽이 주저 앉은지 3일후인 1113, 동독의 에곤 크렌츠 서기장은 75세의 총리(각료회의의장) 빌리 슈토프(Willi Stoph)를 경질하고, 한스 모드로(Hans Modrow)를 그 자리에 올렸다. 크렌츠는 스스로 개혁주의자임을 표방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크렌츠는 앞서 베이징을 방문한 자리에서 텐안먼(天安門) 사건을 진압한 중공식 처리를 지지한 바 있다. 동독의 민주세력은 크렌츠의 사임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1989121, 동독 의회는 사회주의통일당이 국가를 지배한다는 헌법 규정을 폐기했다. 이 조치는 사회주의통일당의 일당독재를 포기하고, 다당제를 도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틀후인 123일 사회주의통일당은 당서기장 크렌츠를 포함해 중앙위원, 정치국원 전원 사임을 발표했다. 크렌츠는 당서기장을 1개월 보름밖에 하지 못한채 물러났다.

이후 사회주의통일당은 당서기장 제도를 폐지하고 당의장 선출제를 도입했다. 당의장 선거에서 41세의 그레고르 기지(Gregor Gysi)가 선출되었다. 기지는 일찍이 소련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을 지지하며 당의 개혁을 추진한 소장파였다. 아울러 그는 폴란드, 헝가리처럼 자유총선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기지는 취임 일성으로 1949년 당 창당 이래 추진한 모든 것을 폐기할 것을 선언했다. 신임 당지도부는 에리히 호네커, 에곤 크렌츠 등 경경파들을 당에서 내쫓고, 당명도 민주사회당(Party of Democratic Socialism)으로 바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청산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동독 지배층의 이러한 변화와 개혁은 너무 늦게 추진되었고, 생존을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마지막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세력은 자유총선 실시를 주장하고, 서독 기독민주당(CDU)의 동독 분국이 정치활동을 본격화했다. 민심은 이미 동독정권과 공산당의 후속정당인 민주사회당을 떠나 있었다.

 

1989년 12월 22일 브란덴부르크 문 개방식일 기다리는 동독 경찰들. /위키피디아
1989년 12월 22일 브란덴부르크 문 개방식일 기다리는 동독 경찰들. /위키피디아

 

동독 정권은 민주세력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폴란드의 선례를 모방해 집권세력과 사회 각 세력이 참가하는 원탁회의(Round Table)를 구성했다.(동독의 원탁은 4각형이었다) 원탁회의는 민주세력 17, 집권세력 16, 여성 및 사회단체 3, 종교계 3석등 모두 39석으로 구성되었다. 회의는 1989127일부터 1990312일까지 16회나 열렸는데, 첫 회의에서 자유총선을 합의하고, 민주화시위 탄압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보안경찰 슈타지(Stasi)의 해체를 결정했다.

 

1989년 12월 7일 동독의 원탁회의 /GHDI(독일역사기록믈보관소)
1989년 12월 7일 동독의 원탁회의 /GHDI(독일역사기록믈보관소)

 

민주화 과정만큼이나 급박했던 것은 동독의 재정악화였다.

1989년말 크렌츠 서기장 시절에 경제학자 게르하르트 쉬러(Gerhard Schürer)가 당지도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동독 경제가 파산 직전의 상태라고 지적한 바 있다. 쉬러 보고서는 동독의 국가부채가 490억 서독마르크(260억 달러)에 이르며, 서독의 지원이 없으면 파산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후 동독의 재정적 신뢰는 급락했다. 보유외환은 바닥이 났고, 동독 마르크는 휴지조각이 되다시피 했다. 동독의 한스 모드로 총리는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24일 내각 각료 가운데 5명명을 민주세력에 배분하며 거국내각을 꾸렸다. 모드로 총리는 이어 212일 서독 콜 총리에게 150억 마르크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콜 총리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콜 총리의 입장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공산정권을 돕기보다는 한달후 총선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취지였다. 결국 서독정부는 3월 이후에 동독정부에 구제금융을 쏟아부어야 했고, 1990년 동독예산의 절반 가량을 지원하게 되었다. 동독 정권이 서독에 접수되지 않았다면, 파산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동독의 카를 마르크스 동상 /위키피디아
동독의 카를 마르크스 동상 /위키피디아

 

총선 일정에 대한 합의는 1990128, 한스 모드로 총리와 원탁회의 대표와의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동독 의회는 220일 의석수 400석에 대한 선거법을 의결했다. 선거일 318일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사회주의통일당 후속정당인 민주사회당은 권력을 배경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에 비해 동독 민주화세력의 기반은 취약했다. 결국 서독의 정당이 동독 자유총선에 뛰어들었다.

헬무트 콜 총리가 이끄는 기민당(CDU)은 동독에 당조직을 확대해 후보를 냈고, 독일사회당(GDU)와 민주혁신을 연합세력으로 끌어 들였다. 서독 사회민주당도 동독 총선에 참여했다.

기민당의 선거구호는 다시 사회주의로 돌아갈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민당은 동독을 서독에 편입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서독 기본법의 동독 적용, 사유재산권 인정, 자유로운 상거래 보장, 서방 자본의 유치를 내걸었다. 기민당의 선거공약 중에 가장 호소력이 높은 대목은 동독마르크와 서독마르크를 11로 교환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의 시장가치의 비율은 41이었는데, 이를 11로 교환하면 동독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동독인들은 서독과 합병함으로써 재산상 이득을 얻게 해 준다는데 귀를 열었다.

선거결과는 기독민주당 163석으로 제1당이 되었고, 연대세력과 합치면 192석으로 총의석의 48%를 차지했다. 또다른 서독정당인 사회민주당은 88(21.9%)을 얻었다. 동독 공산당 후신인 민주사회당은 66(16.4%)를 얻는데 그쳤다.

318일 자유총선의 결과로, 기민당의 로타어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가 총리에 선출되었다. 그는 동독 최초로 자유총선에 의해 선출된 비공산 계열의 총리였으며, 동독의 마지막 총리이기도 했다. 메지에르는 프랑스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선조가 17세기 프랑스의 위그노 탄압 때 프러시아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에 동독에 거주하던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이 정치에 뛰어든다. 그녀는 1989년 민주화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시위에 자극받아 신생 민주혁신에 입당했다. 이어 마지에르 총리의 대변인으로 선발되었다. 메르켈은 마지에르의 탁월한 정치력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곧이어 민주혁신당이 기민당과 합병하면서 메르켈은 기민당원이 되었고, 그후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든다.

 


<참고자료>

Wikipedia, Socialist Unity Party of Germany

Wikipedia, East German Round Table

Wikipedia, History of East Germany

Wikipedia, 1990 East German general e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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