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정치 통합보다 경제 통합이 더 어려웠다
독일, 정치 통합보다 경제 통합이 더 어려웠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5.2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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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⑧…30여년 지나도 여전히 후유증, 유럽의 맹주로 부상

 

동독과 서독이 재결합한지 31년째가 된다. 과거 동독 지역에 인기 없던 공산정권은 사라졌다. 옛동독인들은 더 이상 보안경찰 슈타지의 감시를 받지 않아도 된다. 베를린 장벽과 동서독을 가르던 철의 장막은 구시대 유물이 되었다. 하지만 독일인들 마음에 분단은 사라지지 않았다. 옛 동독지역 사람들은 2등 국민 대우를 받고 있으며, 서독에 의해 점령당했다고 생각한다. 동독 공산당(사회주의통일당)의 후예인 좌파당(Die Linke)이 구 동독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고, 2014년엔 튀링겐주에서 집권당이 되었다. 새로 편입된 동부 주민들은 통일 후의 격차에 정치적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 독일 좌파당의 지역별 지지율 /위키피디아
2017년 독일 좌파당의 지역별 지지율 /위키피디아

 

독일의 통일은 1990103, 동부의 5개주가 서독의 독일연방공화국(Federal Republic of Germany)에 신규 가입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앞서 71일 동서독 마르크화를 11로 교환함으로써 경제 통합이 정치적 통합보다 먼저 단행되었다.

45년 동안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면서 양쪽의 독일인들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라이프스타일, 정치적 신념, 종교관, 문화, 부의 정도는 동과 서의 사람들에겐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단지 같은 언어를 쓰고,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재결합을 했지만, 이질적인 두 집단의 통합에서 파생한 후유증은 30년이 지난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폐기된 동독 국민차 트라반트 (1990) /위키피디아
폐기된 동독 국민차 트라반트 (1990) /위키피디아

 

경제적 통합은 쉽지 않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의 통합은 선례가 없었고 물과 기름을 섞는 것처럼 힘든 과제였다. 서독은 오랫동안 동독을 연구하고 관찰했지만 굴러 들어온 동부 5개 주의 경제적 실체는 예상보다 썩어 있었다.

동독의 국민차로 불렸던 트라반트(Trabant)가 실상을 대변했다. 작센주 츠비카우에서 생산된 이 세단형 승용차는 1957년부터 1991년까지 370만대 이상 생산되었다. 그런데 이 소형차는 시끄럽고 거북이처럼 느렸다. 실내에 타코미터도 없고 전조등, 방향지시등, 레버, 연료게이지, 뒷좌석 벨트도 없었다. 그냥 굴러 다닐 뿐이었다. 동독 정권은 이런 차를 인민에게 보급했고, 동독 사람들은 이 차를 끌고 국경을 넘어 대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이 되면서 세계적 명품차를 자랑하는 서독 차가 밀려들었다. 동독인들은 화폐가 절상되면서 서독 차를 살 여력이 되었고, 트라반트는 고철로 팔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트라반트는 1991년 단종된다. 이 차는 동독의 기술수준과 사회적 후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통일 정부는 구동독 지역에 민간자본을 유치하려고 노력했다. 민간자본을 많이 유치해 산업을 재가동시키면 정부의 공공지출을 줄일수 있다는 것이 서독 당국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선뜻 동부 지역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 첫째 이유는 재산의 소유권이 확정되지 않아 소송에 휘말릴 우려였다. 통일정부는 새로 편입된 동부 5개주에 사유재산제도를 시행했는데, 나치시대, 소련점령기, 동독 지배를 거치면서 소유권이 숱하게 바뀌었다. 옛 소유자들이 소송을 벌이면서 200만 건 이상의 소유권 분쟁이 발생했다. 투자자들은 지리한 소송이 끝날 때까지 분쟁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다.

둘째로 동부 지역의 임금 급상승이다. 양독의 마르크가 등가교환되면서 5개주의 임금코스트가 급상승했고, 일부지역에서는 임금이 생산성을 초과했다. 서부 기업가에겐 동쪽에 공장을 건설하기보다는 기존 공장의 가동률을 높이는 게 이득이었다.

셋째는 인프라 미비였다. 전화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고, 전력이 수시로 끊겼다. 철도와 도로는 보수되지 않았다. 나치 시대에 건설된 아우토반도 다시 건설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헬무트 콜 정부는 동독 기업 민영화를 추진했다. 콜 정부는 신탁청(Treuhand, Trust agency)을 설치하고, 운영을 서독 출신들에게 맡겼다. 준정부조직으로 운영된 신탁청은 400만명을 고용하는 8,500개 국영기업의 매각 작업을 벌였다. 신탁청은 살릴 기업과 청산할 기업을 구분하고, 회생 가능한 기업에 새 주인을 찾아주는 작업을 벌였다.

도쿄와 뉴욕에 지사를 설치해 외국인 투자자를 찾았는데, 일본 기업가는 한사람도 동독 기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미국 기업가는 극소수가 구동독 매물을 기웃거렸고, 서독 자본도 동독 기업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3위 해운회사였던 조양상선이 동독 선사 DSR을 인수, 세계일주항로를 운영하다가 IMF 경제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2001년 파산했다.

통일 직후 동독과 서독의 경제격차는 더 커졌다. 동독 기업들이 오랜 관료화와 기술 낙후로 집단파산했고, 서독 기업들이 새로운 영토에서 발생하는 수요를 독식하다시피 했다. 서독 GDP는 통일이 되던 1990년에 4.6% 성장하고, 고용도 70만명이나 늘었다. 동독인들은 보잘 것 없는 옛동독 기업의 상품을 버리고 서독 제품을 썼으며, 따라서 산업가동률에서 동서독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동독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독으로 몰려감에 따라 동독 공장은 더 황폐해 졌다. 통일 2년 후 동독지역 산업생산은 1989년 수준에 비해 73%나 위축되었다. 거의 전시에 융단 폭격을 당한 듯 동독 경제는 무너졌다.

 

1990년 12월, 구동독 철강노동자들이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위키피디아
1990년 12월, 구동독 철강노동자들이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위키피디아

 

결국 정부가 나서 동서 국민의 차이를 극복하는데 막대한 재원을 투입했다. 동부지역에 민간 투자가 부진한 만큼 정부 재원은 더 많이 지출되었다.

정부 재원은 크게 두 부문에 투입되었다. 첫째는 구동독지역의 인프라 지출이고, 둘째는 구동독인의 사회복지비용이었다. 통일후 3년간 연방정부가 동부 신규편입지역에 투입한 재정규모는 3,500억 마르크에 달했고, 992년 이후에도 연평균 1,500억 마르크가 들어갔다. 1990년에서 1995년까지 7,500~8,500억 마르크가 동독지역 지원금으로 지출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 시기에 구동독인 1인당 5만 마르크 정도가 주로 서독에서 마련된 재원으로 지출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독일 마르크는 1998년 유로로 전환되었는데, 전환 당시 환율은 대략 2마르크=1유로로 결정되었다)

 

독일은 10년 이상 통일 후유증에 시달렸다. 통일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구체적인 수치를 측정하기는 어렵다. 일반적 추산으로 통일 이후 서독지역에서 동독지역으로 흘러들어간 공공자금은 2조 달러 정도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옛동독인과 서독인의 임금수준은 1990년에서 1995년 사이에 35%에서 74%로 올라갔고, 연금 수준도 이 기간에 40%에서 79%로 상승했다.

동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통일 정부가 엄청난 재원을 5개 주에 쏟아붓는 바람에 21세기가 시작될 무렵, 독일은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란 조롱을 받아야 했다. 실업률은 높고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성장률이 낮았다. 옛 동독 지역이 독일 전체를 끌어 내렸다.

이런 시기에 새로운 지원군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유럽통합이었다. 1998년 유럽이 단일통화를 채택하면서 독일의 상품경쟁력은 다른 회원국에 비해 상대적 우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2010년에 독일은 3.6%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유럽 통합 10년만에 독일은 통일 과정의 성장정체를 해소하고 유럽에서 가장 강한 경제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공동통화 유로에 있었다. 독일 경제는 10여년전 마르크를 쓸 때보다 평가절하된 유로를 썼기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효과를 얻었다. 독일 상품 가격이 경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싸졌고, 수출경쟁력이 높아졌다.

2010년 독일은 채무상환능력을 상실한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에 구제금융 지원에 참여함으로써 유럽을 금융위기에서 건져 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여전히 내부에선 통합의 진통이 남아 있지만, 통일 독일은 유럽의 맹주로 부상했다.

 


<참고자료>

Voice of America, German Reunification at 30: Still Struggling to Shed History

Wikipedia, Trabant

Wikipedia, Economic history of the German reunification

Wikipedia, German reun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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