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지도부의 최후…줄줄이 과거청산 재판정에
동독 지도부의 최후…줄줄이 과거청산 재판정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5.2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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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⑨…호네커 당서기장 등, 동독인 살해 감금 혐의로 피소

 

동독 정권은 서독과의 국경에 이중 장벽을 치고 그 안에 사는 인민을 보안경찰 슈타지(Stazi)를 통해 감시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서독 정부는 통일 이전에 동독 정권의 범죄적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중앙기록보존소(Zentrale Erfassungsstelle der Landesjustizverwaltungen)를 설치했다. 이 기구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직후 196111월에 설치되었는데, 동독내 정치범 살해와 박해, 고문 등을 조사, 기록하는 것을 주임무로 했다. 동독 경계도시 잘스기터(Salzgitter)에 본부를 둔 이 기구는 동독 정권의 범죄행위를 차곡차곡 기록했다.

기록보존소는 검사 2, 주 법무부 공무원 1, 일반공무원 4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동독정권의 범죄기록을 사건별 인물별로 기록해 두었다. 기록 대상은 국경탈출자에 대한 발포행위 과도한 형량 부과행위 고문 등 가혹행위 슈타지에 밀고하는 행위 등이었다. 자료는 서독측에서 보석금을 제공하고 석방된 정치범의 진술 서독으로 탈출한 동독 군인의 폭로 동독 발행 간행물의 내용 동독인이 서독인에 보낸 서신 및 통화내용 정보기관의 첩보 서독 국경수비대의 정보보고 등을 통해 수집되었고, 그 내용은 컴퓨터에 수록되어 장기보관되었다.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은 서독의 기록보존소 해체를 주장하고 동독정권에 유화적인 사민당도 기구의 무용론을 제기했지만 서독 정부는 통일이 될 때까지 이 조직을 유지했다. 이 정보는 통일 이전에는 동독의 정치적 가해자들에게 몸을 사리고 조심하도록 하는 경고적, 상징적 의미가 컸다. 그러나 통일이 된 후에 기록보존소의 내용은 동독의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복권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에르푸르트 슈타지 기록청 /위키피디아
에르푸르트 슈타지 기록청 /위키피디아

 

통일과 동시에 동독 공산정권의 과거 행위에 대한 처벌 문제가 수면에 떠올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얼마 되지 않은 1989124일 아침, 슈타지 에르푸르트 지부의 굴뚝에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시민들은 슈타지가 주요문서를 소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민권단체들은 슈타지 건물과 인근의 감옥을 접수하고 그들의 문서를 확보했다. 이 사건이 있은후 슈타지의 문서 보존이 이슈로 부각되었다. 민주화 단체들은 1990115일 베를린 소재 슈타지 본부를 점거하고 문건을 차지했다. 이때만 해도 동독 정권이 유지되고 있을 때였다.

통일 후, 독일 정부는 슈타지 기록물 담당 특임장관을 발령하고, 199112월에 슈타지 문건을 보존, 관리하는 슈타지 기록청(Stasi Records Agency)을 설립했다. 슈타지는 1950년에 설립되었고, 동독의 비밀경찰, 정보기관의 역할을 했으며, 동독 민주화세력의 요구에 의해 19901월 해체되었다. 슈타지 기록청이 확보한 40년간의 문건은 모두 111km에 해당하며, 그중 절반에 베를린 본부에 보관되고, 나머지는 12개 지부에 분산되어 있었다. 슈타지는 절정일 때 27만명의 직원을 두고, 18만명의 비공식 정보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아내가 남편을 감시하고, 목사가 교인의 반정부 활동을 고발하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동독 정권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슈타지가 작성한 명단은 전체인구의 3분의1에 이르는 56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 희생자 기념비(1982) /위키피디아
베를린 장벽 희생자 기념비(1982) /위키피디아

 

통일독일 정부는 과거 서독 정부가 동독지역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통일정부는 동독의 과거 청산을 해결하지 않고는 넘어갈수 없었다. 구동독 정권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았고, 가해자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처벌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증거는 충분히 확보되었다.

문제는 동독과 서독의 통일 조약에서 과거 행위에 대해 당시 동독법 규정에 따라 불법여부를 판단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동독 가해자들의 범죄적 행위 대부분이 구동독법에 따라 합법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일 법체계로 소급입법을 만들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연방대법원 결정이 중요한 가늠자가 되었다. 대법원은 동독 정치국원의 범죄행위와 동독 군인의 월경자 총격행위는 자연법적 질서에 위배되며, 동독 치하 40년간 공소시효가 정지된다고 해석했다.

 

1990년 1월, 의사가 호네커의 지병이 악화되어 구금될수 없다고 발표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90년 1월, 의사가 호네커의 지병이 악화되어 구금될수 없다고 발표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동독 정권의 범죄행위를 단죄하려면, 18년간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을 역임한 에리히 호네커 (Erich Honecker)를 법정에 세워야 했다.

호네커는 신변 위협을 느껴 베를린 외곽 소련주둔군 병원으로 피신했다. 그는 19913월 아내와 함께 소련 군용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도피했다. 모스크바도 그에게 안전하지 않았다. 소련이 해체 직전이었고,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호네커의 망명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북한이 그에게 망명처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호네커는 북한의 제의를 거절하고 칠레로 가려고, 모스크바 주재 칠레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199011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고르바초프가 물러나고, 옐친이 호네커의 신병을 책임지게 되었다.

19925월 독일 연방검찰은 호네커를 포함해 6명의 전직 정치국원에 대해 동독 국민을 집단학살한 혐의로 기소했다. 호네커는 베를린 장벽을 월경하는 주민에 대해 사살명령을 내렸으며, 슈타지를 통해 정치범 1,000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호네커와 함께 기소된 인물은 슈타지 책임자였던 에리히 밀케(Erich Mielke) 총리를 역임한 빌리 슈토프(Willi Stoph) 하인츠 케슬러(Heinz Kessle) 전 국방장관, 프리츠 슈트렐레츠(Fritz Streletz) 전 국방부 부장관 한스 알브레히트(Hans Albrecht) 전 동베를린 공산당총책 등이다.

독일 정부는 러시아에 호네커의 인도를 요구했다.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옐친은 더 이상 호네커를 보호하지 않고 독일에 넘겨주었다. 호네커는 19927월 독일로 돌아왔다.

구동독 고위층 6인에 대한 재판은 199211월 시작되었다. 호네커는 자신에 대한 재판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개재판이며, 서독 재판부가 자신을 판결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재판이 시작될 즈음에 간암이 번져 투병 중이었는데, 그의 변호인들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을 재판정에 세우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15회의 공판을 거친후 호네커가 재판 종료까지 생존할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여 19931월에 그를 석방했다. 그는 칠레로 건너가 19945월에 81세의 나이로 숨졌다. 칠레 공산당은 그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나머지 5명 가운데 슈타지 장관 총책 밀케를 제외한 4명도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밀케는 형기의 3분의2를 채운후 1995년에 석방되었다. 중요한 건 동독 지도부 가운데 아무도 사형대에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에리히 호네커와 에곤 크란츠 /위키피디아
에리히 호네커와 에곤 크란츠 /위키피디아

 

사회주의통일당의 마지막 서기장으로, 재임 중에 베를린장벽 붕괴를 묵인한 에곤 크렌츠(Egon Krenz)도 재판정에 섰다. 그의 서기장 재임 기간은 한달반밖에 되지 않지만, 월경자 살해와 선거조작 등의 혐의로 1997년에 16개월 형을 받았다. 그는 형기를 마치고 고향에서 조용하게 살고 있다. 그는 아직도 구동독 공산주의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옛동독 시절을 그리워하는 오스탈기(Ostalgie)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의 단초를 제공한 귄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도 동독주민 살해혐의로 기소되어 3년형을 받았으나, 베를린 시장이 그를 용서해 주어 1년만에 석방되었다. 그는 사회주의통합당을 탈당해 기민당을 후원함으로써 옛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로 비난받았다. 그는 20151186세로 사망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Central Registry of State Judicial Administrations

Wikipedia, Stasi Records Agency

Wikipedia, Erich Honecker

Wikipedia, Egon Krenz

염돈재,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평화문제연구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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