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권의 사순 가문 후손들…이집트에서 추방
아랍권의 사순 가문 후손들…이집트에서 추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5.3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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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가문③…수에즈운하 유전 부동산 등에 투자, 스위스에서 펀드 운영

 

아시아에서 부의 제국을 형성한 유대인 사순 가문(Sassoon family)의 계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오스만투르크의 바그다드 총독부에서 재무담당관을 하던 살레 사순(Saleh Sassoon, 1750-1830)에게는 큰아들 데이비드(David, 17921864)와 둘째 아들 조지프(Joseph, 17951872)가 있었다. 19세기초에 반유대적인 총독이 바그다드에 부임하면서 큰아들 데이비드는 바그다드를 떠나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 봄베이(뭄바이)에 정착했다. 데이비드와 그 후손들은 봄베이를 중심으로 중국, 일본에서 무역업을 일으켜 동양의 로스차일드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거대한 아시아 유대상권을 형성했다.

 

그러면 데이비드보다 세 살 어린 조지프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지프 사순도 총독과 사이가 뒤틀어져 바그다드를 떠나 시리아의 알레포(Aleppo)로 이주했다. 알레포는 메소포타미아와 소아시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길목에 있는 고대 이래 무역도시다.

조지프는 알레포에서 또다른 유대인 다얀가문(Dayan family)과 혼맥을 맺으면서, 알레포-이집트-아메리카(미국)를 연결하는 무역시장을 개척했다. 조지프는 조상들이 경영해온 사순형제회사(Sassoon Frères & Co.)를 인수해 사순머천트하우스(Sassoon Merchant House)로 개편했다.

조지프의 회사는 세 업종에 종사했는데, 그것은 무역, 금융, 해운 분야였다. 조지프도 유대인 가문의 특성대로 아들들을 사업에 참여시켜 알레포를 중심으로, 그리스의 테살로니카, 아테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연결하고, 신생국인 미국과 남미국가들과 무역로를 개척했다. 1858년에는 프랑스가 주도하는 수에즈 운하 건설에 투자하기도 했다.

조지프의 회사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수치로 확인되지 않지만, 인도 봄베이에서 사업을 개척한 형 데이비드의 회사에 못지 않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조지프가 죽은후 가업은 아들 모세스(Moses Sassoon, 18281909)에게 계승되었으며, 모세스는 가문을 괴롭히던 총독이 물러남에 따라 다시 바그다드로 진출했다.

모세스에 이어 그의 아들 제이콥 사순(Jacob Sassoon, 18501936)은 이집트에서 면직공장을 세워 현지 최대수출업자로 성장했다. 이집트의 사순 가문은 인도의 친척들처럼 미국의 남북 전쟁으로 국제면화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큰 돈을 벌었다.

1921년 제이콥은 회사를 알레포에서 이집트 카이로로 이전하고, 회사 이름을 사순상회(Sassoon & Co.)로 변경했다. 이집트에서 사순 가문은 부동산 투자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면서 사순 가문이 투자한 운하 주변 도시의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사순 상회는 세계의 미래가 석유산업에 달렸다고 판단하고, 중동 석유탐사에 뛰어들었다. 가문은 중동에 무진장한 석유의 보고가 될 것으로 믿었다. 사순상회는 BP(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의 원조가 되는 버마오일(Burmah Oil Company), 터키석유, 앵글로-이란석유에 투자했다. 이 회사들이 나중에 이란과 이라크의 독점 석유채굴회사가 된다.

사순상회는 또 독일과 오스만투르크가 합작으로 추진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부설에도 참여했다. 이를 위해 사순상회는 오스만투르크에서 유럽 로스차일드 은행의 대리인 역할을 떠맡기도 했다.

 

카이로와 알레포의 사순 가문 (1930년대) /Jerusalem Post
카이로와 알레포의 사순 가문 (1930년대) /Jerusalem Post

 

조지프 가문에서 뛰어난 사업가는 제이콥의 손자 엘리어스 니심(Elias Nissim Joseph Sassoon, 1928-2010)이다. 엘리어스 니심이 알렉산드리아의 빅토리아 대학을 졸업한 후 가업에 참여한 것은 2차 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5,000 파운드를 빌려, 그 돈을 미국의 석유재벌 스탠더드오일(Standard Oil)에 투자할 정도로 석유산업에 집착했다.

엘리어스는 은행업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유대인 죽마고우인 조지프 카타우이(Moise Joseph Maurice Cattaui)와 함께 1952년 카이로 은행(Bank of Cairo)을 설립했다. 카이로은행은 당시 이집트에만 231개 지점을 가진 최대상업은행으로 성장했고, 중동과 북아프리카 각지에 지점을 설치했다.

엘리어스는 사순상회의 사업을 프랑스, 브라질, 남미, 미국으로 확대했다. 1953년에는 아프리카 광산업에도 투자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이로의 사순상회에게 큰 불행이 찾아왔다. 1954년 이집트의 장교 가말 압데르 나세르(Gamal Abdel Nasser)가 쿠데타에 성공, 권력을 장악했다. 나세르 정권은 1956년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이어 외국인과 유대인 자산을 동결했다. 곧이어 국내거주 외국인과 유대인을 추방했다.

유대인들은 자산이 몰수된 상태에서 가방 하나에 옷가지만 챙겨서 출국하도록 강요당했다. 유대인들이 이집트의 학문과 정치, 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은 깡그리 무시되었다.

사순 가문은 모든 재산을 빼앗긴 채 이집트를 떠나야 했다. 엘리어스 니심과 그의 아내는 1966년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그리스행 여객선에 올라탔다. 엘리어스의 아내는 이집트인이었으나, 남편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국적마저 박탈되었다. 그의 아내는 겨우 시리아 국적을 회복해 해외에 거주했다.

그의 아들 에두아드(Edouard Elias Sassoon, 19481985)는 알렉산드리아에 재학중이었는데, 출국비자를 발급받지 못했다. 나세르 정부는 엘리어스가 이집트의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며 그 돈을 되돌려 오기 전에 아들을 풀어 줄수 없다고 협박했다. 엘리어스가 400만 파운드의 몸값을 지불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한 후에야 아들 에두아드는 1971년에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가족과 합류하게 되었다.

 

엘리어스는 카타우이 집안과 공동으로 1961년 스위스 로잔에 사순-카타우이 지주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패밀리 헤지펀드였다. 나세르 정권이 비난한 것도 이런 대목이었을 것이다. 이 헤지펀드는 부동산, 귀금속, 석유회사, 외환거래, 주식 등 다양하게 투자하는데, 투자종목은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이다.

2010년 엘리어스 니심이 죽었을 때, 사순-카타우이 두 집안 공동펀드의 운영자금이 1,000억 달러에 이르렀다는 주장이 있다. 이 펀드는 미국 증권거래당국인 SEC에 보고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자금규모가 공개되지 않는다.

예루살렘 포스트에 따르면, 2020년에 엘리어스의 손자 데이비드 E. 사순이 가업을 이어받아 활동을 재개했다. 사순 펀드는 이스라엘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데, 3D 인쇄와 같은 IT산업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

 

에스켈 사순과 그의 가족들(1927) /위키피디아
에스켈 사순과 그의 가족들(1927) /위키피디아

 

사순 가문 가운데 원적지인 바그다드로 돌아가 고위직에 오른 인물도 있다. 사순 에스켈(Sassoon Eskell)1차 대전 기간에 영국의 후원을 받아 아라비아의 로런스로 불린 토머스 로런스(T. E. Lawrence)와 손잡고 아랍국가 수립에 기여했다. 그는 1차 대전후 수립된 이라크 왕국에서 재무장관을 지냈다. 바그다드의 재상을 맡아 왔던 사순 가문의 오랜 전통이 일시적으로나마 회복된 것이다.

 


<참고자료>

Jerusalem Post, The Sassoon family saga: The Israeli phase

Wikipedia, Sassoon family

Wikipedia, Sassoon Esk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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