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전 바다속 암초 위에 건축한 벨록 등대
200년전 바다속 암초 위에 건축한 벨록 등대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2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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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개축하지 않고 유지…세계 7대 기적의 하나로 꼽혀

 

스코틀랜드 동부 테이 포구(Firth of Tay)에서 서쪽으로 17km쯤에 벨록(Bell Rock)이라는 암초가 있다. 이 암초는 썰물 때 한두시간만 모습을 드러내고, 내내 물속에 잠겨 있다. 이 암초는 세계의 바다를 제패한 영국에게도 큰 골치덩어리였다. 전체 길이 400m인 이 암초는 북해에서 포구로 들어오는 배에겐 괴물이나 다름 없었다. 잘 보이지도 않는데다 뱃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어 풍랑이 심한 날에는 암초가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 곳에 등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수십척의 배가 이 암초에 부딛쳐 좌초되었다.

이 곳에 등대를 만들자는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풍랑이 거세고 수면에 떠 있는 시간이 짧아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14세기에 한 수도사가 용케도 암초에 종(bell)을 다는데 성공했다. 파도가 치면 종이 울려 그곳을 지나는 배들이 암초를 피할수 있었다. 하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네덜란드 해적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종을 훔쳐 달아났다. 그 해적은 곧 다른 암초에 걸려 죽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 암초를 종 바위’(Bell Rock)이라 부르게 되었다.

 

벨록 등대 그림 (J. M. W. Turner 작, 1819) /위키피디아
벨록 등대 그림 (J. M. W. Turner 작, 1819) /위키피디아

 

178611월년 영국은 북부등대위원회를 만들어 스코틀랜드 지역의 해안에 등대를 만드는 사업을 벌였다. 논의 과정에서 벨록에도 등대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때 토머스 스티븐슨(Robert Stevenson)이라는 젊은 등대 사업자가 벨록에 등대를 세우는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바닷속 암초에 등대를 만든 경험이 없는데다 설사 짓더라도 비용이 엄청나게 들 것으로 판단해서 스티븐의 의견을 보류했다.

그러던 중에 179912월 스코틀랜드에 거센 폭풍우가 몰아쳤다. 북해를 운항하던 배들이 테이 포구에 들어오려다 벨록 암초가 무서워 바다에 대기하고 있었다. 폭풍우는 사흘간 지속되었고, 선박 70척이 침몰했다.

이젠 등대위원회도 스티븐슨의 의견대로 암초 위에 등대를 짓는데 동의했다.

벨록 등대 공사는 난공사였다. 잔잔한 날에도 암초 근처만 가면 파도가 매서울 정도로 사나웠다. 암초 위에는 해초가 잔뜩 자라 미끌거렸다. 그나마 하루에 겨우 한두시간 바위에 올라갈 시간이 주어졌다. 영국 BBC2003년에 세계 7대 기적을 선정하면서 벨록 등대 공사를 그 하나로 선정했다.

 

벨록 등대 건설 중 기중기와 가건물 /위키피디아
벨록 등대 건설 중 기중기와 가건물 /위키피디아

 

공사는 1807년에 시작되었다. 스티븐슨은 60명의 인부를 고용했다. 스코틀랜드 북부는 추웠기 때문에 5월에 공사를 시작해 겨울이 오기 전까지 1년에 5~6개월만 시간이 주어졌다. 물자를 실은 배를 암초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정박시켜 놓고 작은 보트로 하나씩 옮겼다.

우선 암초 위에 올라가 석공들이 구멍을 팠다. 그나마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루에 한두시간, 그들은 구멍을 파고 다음날 구멍의 물을 빼낸 다음 다시 구멍을 팠다. 그 위에 파일 박듯이 철봉을 박았다. 거푸집처럼 임시 건물을 지어 인부들이 일할 공간을 만들었다.

로버트 스티븐슨 흉상 /위키피디아
로버트 스티븐슨 흉상 /위키피디아

 

인부들이 암초에 접근하기를 꺼려 했다. 며칠 일하다가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인부들을 선상에서 생활하게 했다.

첫해엔 기초공사만 했다. 겨울이 오자 인무들을 집에서 쉬게 했다.

이듬해인 1808년에 공사를 재개해 7월에 깊이 60cm의 기초공사를 마쳤다. 이제부터 돌을 옮겨 쌓아 올리는 일을 해야 했다.

스티븐슨은 잉카의 신전을 짓듯이 돌을 다각형으로 깎아 퍼즐 맞추듯 끼워 나가는 방식을 채택했다. 다면체를 벽돌 쌓듯이 그냥 쌓으면 파도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리석을 구해왔다. 대리석 하나하나를 깎는 것도 힘들지만 수송하는 것도 힘들었다. 8월 중순에 첫 번째 층이 만들어졌다. 2주뒤 두 번째 층이 올라갔다. 세 번째 층을 올리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작업을 중단했다.

셋째 해인 1809년 등대는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6월말이 되자 수면에서 작업을 하기 어려워 임시로 가건물을 짓고 기중기를 설치했다. 가건물과 등대공사 현장까지는 다리를 놓았다. 어느날 다리를 건너던 인부가 떨어져 죽는 사고도 발생했다. 등대가 높이 올라갈수록 작업이 더뎠다. 8월말 26개 층으로 된 석재 건축물이 마무리되고, 조명실을 설치하는 일만 남았다.

1810년 네덜란드와의 전쟁으로 항해금지령이 실시되면서 잠시 공사가 중단되었지만, 벨록 등대공사는 예외로 인정되어 조명실 설치작업을 마치게 되었다. 안개가 끼는 날에는 등대 불이 소용 없기 때문에 종으로 등대의 위치를 알리는 포그 벨(fog bell)도 설치되었다.

벨록 등대는 181121일 첫 불을 밝혔다. 등대는 난공불락의 암초 위에서 암초에 대한 공포를 잠재웠다.

스티븐슨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후 그는 항구, 도로 건설부문에서 많은 수주를 따냈다. 스티븐슨은 1850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과 손자가 등대건설업을 이어받았다.

 

밀물 때 물에 잠긴 벨록 등대 /위키피디아
밀물 때 물에 잠긴 벨록 등대 /위키피디아

 

벨록 등대는 거친 바다와 싸우며 암초 위에 건설되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등대의 견고함에서도 후세의 칭찬을 얻고 있다. 1810년 완공된후 200여년이 지났지만, 등대는 한번도 재건축되거나 한번도 수리및 보수 공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등대의 신호작동 방법만 바뀌었다. 이전에는 등대원이 오가며 불을 켰지만, 1988년 이후 자동화되면서 원격 자동조절장치로 등대불이 켜지고 꺼진다.

 

벨록 등대의 위치 /위키피디아
벨록 등대의 위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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