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코프 푸거 이후, 스페인 파산-종교전쟁에 쇠락
야코프 푸거 이후, 스페인 파산-종교전쟁에 쇠락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6.1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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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거가문⑧…푸거하우스-푸거라이 등 아직도 푸거의 이름 남아

 

푸거 은행은 막시밀리안-카를 5-페르디난트 황제로 이어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성기에 화려한 꽃을 피웠다. 푸거 가문은 합스부르크가 일으킨 전쟁에 비용을 대서 높은 수익을 냈고, 합스부르크의 쇠퇴와 함께 가라앉았다. 권력은 돈을 필요로 했고, 전주는 권력의 비호를 받았다. 푸거 은행은 당대 최대 권력자였던 합스부르크의 최대후원자였고, 동시에 최대 이권자였다.

15251230일 야코프 푸거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자산은 3,000,058 길더, 채무는 867,797 길더였다. 채무를 제외한 순자산은 2,232,261 길더로, 이 금액을 요즘 미국 달러화로 환산하면 4,000억 달러에 달한다. 20세기초에 미국 석유산업을 독점해 미국 역사상 최대 부호로 꼽히는 존 록펠러도 이에 미치지 못했다.

야코프가 형제들과 함께 사업에 참여했던 1494년에 푸거은행의 자산은 54,385 길더였다. 1511년에 196,791 길더로 연수익률 8%를 기록했다. 이후 푸거은행은 급성장해 1527년에 202만 길더에 달했는데, 1511~1527년 사이 연수익률은 16%로 껑충 뛰었다. 권력을 쥔 합스브루크 황실은 빚더미에 올랐지만, 권력에 돈을 댄 푸거 은행은 엄청난 이익을 낸 것이다. 33년간 연평균 수익률 12%였는데, 지금도 이 정도 수익률을 내는 은행은 세계 어디를 찾아보아도 없다.

 

야코프는 불행하게도 아들이 없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큰 형의 아들 히에로나무스(Hieronymus), 또다른 형 게오르크의 아들 라이문트(Raymund)와 안톤(Anton)을 비교했다. 히에로나무스는 무능했고, 라이문트는 병약했다. 야코프는 안톤에게 가업을 맡겼다. 야코프가 죽은 후에도 푸거 은행은 100여년을 더 이어갔지만, 그보다 유능한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내 지빌레 아르츠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지빌레에겐 허스름한 집 하나 주고 경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지빌레는 야코프가 죽은후 재혼했다.

 

야코프 푸거와 아내 지빌레 아르츠트 /위키피디아
야코프 푸거와 아내 지빌레 아르츠트 /위키피디아

 

안톤은 1525년 폭동 때 반란자에 점거당했던 헝가리 광산을 돌려받고 라요쉬(Lajos) 국왕에게 전쟁비용으로 5만 길더를 빌려주었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는 헝가리를 침공했는데, 라요시는 1526년 오스만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헝가리 국왕을 겸직하게 되었다. 헝가리는 이때부터 1차 대전이 끝날 때(1918)까지 400년 가까이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안톤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요구하는대로 돈을 빌려주지는 않았다. 1527년 카를 1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 안톤은 합스부르크에 전쟁비용 대출을 거부했다. 카를의 용병은 봉급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로마를 침공해 전대미문의 대약탈을 벌였다.

이후 안톤은 합스부르크와의 관계를 개선했다. 1530년 독일왕 선거에서 안톤은 카를 5세의 아들 페르디난트의 당선을 위해 275,000 길더를 빌려주었다. 독일왕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기 직전에 맡는 자리로, 7명의 선제후에 의해 선출되었다. 안톤이 지원한 돈은 선제후에게 뇌물로 들어갔다. 푸거 은행은 그 대가로 나폴리왕국의 세수를 확보했다.

푸거은행은 합스부르크에 대출한 돈의 댓가로 당시 세계최대 수은광산이었던 스페인 알마덴 광산을 양도받았다. 당시 수은은 은 제련에 촉매제로 사용되었는데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수요가 많았다. 푸거은행이 생산한 수은은 남미 포토시 광산 등에 수출되었다. 스페인에서 생산된 수은은 은 제련에 사용되어 인디언 수백만명을 사망케 했다. 푸가가는 1645년까지 스페인에서 수은 광산사업에 참여했다.

안톤도 돈 되는 것은 모두 뛰어들었다. 아프리카 흑인을 아메리카 대륙에 수송하는 노예무역에도 참여했고, 동남아 향료 수입, 헝가리산 소 수입에도 참여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안톤에게 칠레와 페루에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그 기회를 포기했다. 이에 비해 푸거의 경쟁자였던 벨저 가문은 베네수엘라 식민지 건설에 뛰어들었다. 벨저도 끝내 베네수엘라에서 실패했다. 안톤의 판단이 맞았던 것이다.

1530년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를 방문해 안톤과 라이문트, 히에로나무스에게 귀족작위를 하사했다. 조카들도 삼촌처럼 귀족 지위에 오른 것이다.

 

안톤 푸거, 요한 푸거, 마르쿠스 푸거(왼쪽부터) /위키피디아
안톤 푸거, 요한 푸거, 마르쿠스 푸거(왼쪽부터) /위키피디아

 

1546년 안톤은 합스부르크의 채무 일부를 탕감해 주었다. 그는 합스부르크와 체결한 채무증서를 일부를 불태웠는데, 어차피 받지 못할 돈이었다. 스페인 재정이 파탄나기 시작한 것이다. 합스부르크의 스페인 왕국은 1557, 1560, 1575년 세 번에 걸쳐 국가 파산을 선언했다. 신대륙에서 끊임없이 금과 은이 수송될 것처럼 보였던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치와 전쟁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지불불능 상태로 인해 다수의 아우크스부르크 금융업자들이 파산했다. 푸거는 이 와중에 살아 남았지만, 큰 타격을 입었다. 스페인 파산은 푸거 은행 소멸의 주원인이 되었다.

합스부르크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벌인 네덜란드에 상업과 금융업이 번성하면서 푸거는 유럽 제일의 자리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푸거 가문을 괴롭힌 또다른 요인은 독일 귀족들의 신교도로의 전향이었다. 푸거 가문은 끝까지 구교 카톨릭을 고수했다. 푸거는 프로테스탄트로 돌아선 영주들에게 대출을 중단했다. 푸거가는 카톨릭이 수호자인 합스부르크와 교황청과의 거래에 매달렸는데, 그 영역이 점점 좁아들었다. 독일 북부의 신교도 영주들은 푸거은행과의 거래를 중단했다. 푸거는 독일의 종교전쟁에서 합스부르크와 구교도 영주만 지원했다.

 

푸거하우스 /위키피디아
푸거하우스 /위키피디아

 

1560년 안톤은 조카 요한(Johann)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안톤의 말기에 푸거 은행은 전성기의 5분의1 수준으로 위축되었고, 요한은 무능했다. 거의 망해가던 회사를 다시 살린 사람은 안톤의 아들 마르쿠스(Marcus)였다.

마르쿠스는 수익성 없는 사업을 정리하고, 스페인 수은광산에 새로운 공법을 도입,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마르쿠스는 사업을 다시 일으켜 예전 수준을 회복하는 듯했다.

하지만 마르쿠스가 1595년 사망한 이후 회사를 떠맡을 사람이 없었다. 후손들은 힘들고 귀챦은 경영보다는 자산을 매각해 영지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 했다. 야코프가 일으킨 스페인 사업은 1637년 파산했다. 1657년 레오폴트 푸거가 티롤 광산을 매각한 것을 계기로 푸거가문은 사업에서 일체 손을 뗐다.

 

푸거라이 /위키피디아
푸거라이 /위키피디아

 

푸거 가문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는 푸거하우스(Fuggerhäuser)는 야코프 푸거가 1512~1515년에 지은 대형 저택이다. 푸거 가문은 이곳에 살며 영업활동을 벌였다. 2차 대전 때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나, 후손들이 돈을 대 복원했다. 지금도 푸거 후손들이 살고 있다.

푸거라이(Fuggerei)는 푸거 형제들이 돈을 벌어 아우크스부르크의 빈민들에게 베푼 공동주거시설이다. 야코프 푸거에 의해 1516년에 건설되었다. 67개의 건물 안에 147개의 아파트들이 있고, 교회와 우물이 각 한 곳씩 있어 도시 안의 도시로 불린다. 1년 주거비는 처음 개설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1길더(0.88유로)이며, 거주자의 규칙도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있다. 매일 주기도문과 성모에게 드리는 기도를 외워야 한다. 오늘날에도 푸거 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이외에도 푸거가문의 묘지가 있는 세인트 안나 교회, 아우스부르크와 슈바벤 지역의 각종 성채가 남아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Fugger family

Wikipedia, Jakob Fugger

그레그 스타인메츠, “자본가의 탄생”, 부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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