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때 대염상 강춘, 염세 개혁으로 파산하다
건륭제 때 대염상 강춘, 염세 개혁으로 파산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6.1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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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로 크고 뇌물로 망한 정상배…호설암과 함께 휘상의 대부격

 

중국 휘상(徽商) 가운데 유명한 인물로 후쉐옌(胡雪岩)과 장춘(江春)을 꼽을수 있다. 후쉐옌은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의 조상이고, 장춘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선대라고 한다. 중국 지도부를 장악한 상하이파는 명청조에 주름잡던 휘상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휘상의 후손에서 두명의 국가주석이 나왔으니, 그 뿌리가 대단하다고 하겠다.

 

장춘(이하 강춘)은 후쉐옌보다 100년전, 건륭제 때의 상인이었다.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5)는 청()나라 최전성기를 누린 황제다. 건륭제는 양쯔강 이남을 자주 순방했다. 이를 남순(南巡)이라 했다. 황제는 재위 60년 동안에 강남을 여섯 번이나 찾았다. 반청(反淸) 정서가 강한 남중국인들을 다독이고, 물산이 풍부한 강남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남은 당시 중국 소금의 70% 가까이를 생산해 염상(鹽商)이 번성했다.

안후이(安徽)성 휘주를 고향으로 하는 휘상(徽商)들에겐 황제의 순방이 절호의 기회였다. 황제의 마음을 사면 사업의 기회가 커지고, 황제의 미움을 사면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건륭제는 대운하를 따라 배를 타고 강남의 중심인 양주(楊洲)를 찾았다. 대운하와 양쯔강이 만나는 그 곳에 중국의 모든 물자가 모여 들었다. 황제가 도착하기 앞서 휘주 상인들이 바빴다. 그들은 황제를 맞이 하기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대규모 정원을 만들고 길을 닦고 황제에게 진상할 진기한 물건을 구해 놓았다. 건륭제의 남순은 강남의 화려한 건축과 예술, 문화를 꽃피우게 한 계기가 되었다.

휘상들의 휘황찬란한 접대에 황제는 물론 청 조정의 고위관리들이 흡족해 했다. 건륭제는 이곳 상인들의 부유함은 짐조차 따를수 없구나며 놀라움과 칭찬을 쏟아 냈다.

황제와 조정 관리들은 상인들에게 보상을 내렸다. 휘상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강남 일대의 사업권을 장악한다. 청 조정은 염상의 세습과 독점경영을 보호하는 강염법을 실시했고, 강소, 안휘, 강서, 호남, 호북, 호남의 6개성의 소금생산지를 양회 염정관(兩淮鹽政官)이 담당토록 했다. 이 양회 대염상(총상) 8명중 4명을 휘주 흡현 출신이 차지했다.

 

강춘(江春))은 건륭제 시기에 휘주 출신의 대염상이었다. 부친이 총상을 오래했고, 그도 40년간 총상을 맡았다.

건륭제가 양주에 순행하던 중 강남 최고의 명승지 수서호(瘦西湖)에서 배를 타고 놀다가 오정교(五亭橋)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돌연 고향생각이 나 "이곳은 베이징의 경도춘음(瓊島春蔭)과 비슷하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백탑(白塔)이 하나 부족하구나."라고 말했다.

강춘이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화가들을 동원해 백탑의 초도(草圖)를 그리게 했다. 그리고 수십명의 장인을 모아 밤낮으로 일을 시켜 백탑을 만들었다. 3일 후에 건륭제가 다시 호수에 와 놀 때 담록색의 커튼을 여니, 오정교의 옆에 백탑이 우뚝 솟아있는 것을 보게 된다. 황제가 깜짝 놀라자, 양주의 관리들이 "이것은 폐하가 수서호를 유람할 때 아쉬움을 느꼈다고 하여, 염상이 사람을 시켜 밤을 세워 만든 것입니다"고 아부했다. 건륭제는 기뻐하며 그 염상의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이때 강춘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강춘(1720~1789)의 소금가게 이름은 강광달(江廣達)이라고 했다. 강춘은 유학자의 풍모를 지녔다.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장사에 능통했을 뿐아니라. 문장에도 능했다. 관리를 상대할 때 시사를 읊으며 접대를 했다. 그는 덕음반(德音班)과 춘대반(春臺班)이라는 두 개의 극단(戱班)을 운영했는데, 그곳에는 강호의 저명한 예인들이 이름을 걸었고, 연출하는 극의 종류가 천 가지에 달했다고 한다.

나중에 건륭제가 80세 생일을 축하할 때, 4대 휘반(四大徽班)이 북경으로 가서 공연했는데, 그중에는 강춘의 춘대반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관계를 이용해 강춘은 건륭제를 8번이나 접견했다. 강춘에게는 이보다 큰 영광이 없었다. 그는 건륭제를 알현할 때 마다 어마어마한 기부금을 냈다. 건륭 50(1785)에는 베이징의 연회에 초대되어 황제로부터 사장(賜杖), 지팡이를 하사받는 영광을 누렸다.

 

청나라 대염상 강춘(江春, 1720~1789) /바이두백과
청나라 대염상 강춘(江春, 1720~1789) /바이두백과

 

건륭제 시기에 유명한 염세(鹽稅) 사건이 발생하는데, 여기에 강춘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

건륭13(1748)에 양회염정관은 길경(吉慶)이라는 자였다. 어느날, 길경이 대염상 강춘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다. 연회에 참가한 길경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듣고 시를 지으며 흥겹게 놀았다. 연회가 끝날 무렵, 길경은 강춘에게서 몰래 봉투를 받았다. 그 안에는 무려 5만냥의 은표가 들어 있었다.

중국은 오랫동안 소금산업에 대해 전매제를 실시해왔고, 청나라 시대에는 조정에서 염상에게 소금을 구매하고 판매할수 있는 허가증으로 염인(鹽引)을 발급했다. 정부와 일부 상인의 독점은 부패를 불렀다. 청나라 염() 산업도 부패를 비껴갈수 없었다. 염업 전매는 관리들이 장악했는데, 견제와 감독이 결핍될 경우 악성종양이 발생할 여지가 커졌다.

강춘의 뇌물 제공은 목적이 있었다. 염상이 바라는 것은 염인 발급량을 늘려달라는 것이었다. 뇌물을 받았으니, 길경은 조정에 염인 발급을 늘려달라고 주청을 했다. 길경의 주청은 호부로 보내졌고, 견륭제는 주청을 받아들여 결제를 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한해 소금 수요량이 급격하게 늘지 않을 것이므로, 내년도 분을 미리 당겨 주도록 임시조치를 내린 것이다. 결국 청 조정이 발급한 것은 차기 년도 분을 미리 사용하는 대신에 예제염인식은(預提鹽引息銀)이라는 담보를 서도록 한 것이다. 일종의 외상거래다.

길경이 선례를 만들자, 그후에 온 양회염정인 보복(普福), 고항(高恒) 등도 매년 돈 봉투를 받고 그 다음해 염인을 당겨서 발급해주었다. 수뢰액도 불어났다.

20년이 지난 건륭 33(1768)에 우세발(尤世拔)이라는 자가 염정관으로 부임해 왔다. 이번에도 염상들이 돈봉투를 주었다. 그런데 우세발은 돈봉투를 거절했다. 그가 청렴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동안 당겨준 염인과 염인대금 미납금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 들통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우세발은 뇌물을 받느냐, 뇌물을 거절하고 고발할 것인지를 놓고 따져본 후 자신이 파악한 문제점을 모조리 적어 황제에게 보고했다.

 

건륭제는 대신 창보(彰寶)에게 이 사건의 조사를 맡겼다. 4개월여의 조사를 해보니, 20년간 양회염정의 재무 부정이 드러났고, 부정부패한 금액이 1천만냥에 이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건륭제는 진노했다. 형부에 분부해 한 명도 빠트리지 말고 엄히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강춘도 잡혀 조사를 받았다. 그는 심문을 받을 때 대장부의 기개를 드러냈다. 강춘은 양회염인의 문제는 자신 한사람의 책임이고, 다른 사람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건륭제는 그 소식을 듣고 위기에도 사내다움과 어른의 풍모를 보였다 하며 특별사면을 내렸다고 한다.

강춘은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정치적 배경이 필요했다. 그는 건륭제를 든든한 정치적 배경으로 삼았다. 장사치가 정치꾼과 관련되면 많은 돈이 든다. 그렇지만 더 많은 돈을 회수할 수 있다. 강춘은 이 이치를 잘 알았다. 그는 건륭제에게 건넨 돈이 무려 1,120만냥량이 된다고 한다. 그가 대역죄인으로 심문을 당하면서도 감히 큰 소리칠수 있었던 것은 뒤에 건륭제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건륭제 앞에서 “”제게 금산은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폐하께서 말씀만 내리시면 정정당당하게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빌린다는 말도 필요없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염정관리와 염상들은 그렇지 못했다. 양회염정이었던 보복, 고항, 염운사인 노견증(盧見曾) 3명은 모두 처형되고, 또다른 대염상 황원덕, 서상지, 황전춘, 강계원등도 사형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어쨌든 건륭제는 재위 33(1768)에 양회지역의 염세에 대해 대개혁을 단행했다. 소금산업에 대한 개혁조치로 휘주 출신 염상들이 줄줄이 몰락했고, 강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춘은 가산을 모두 잃고 가난하게 만년을 보낸다. 건륭제가 나중에 소식을 듣고 은혜를 베풀어 국고에서 돈을 대 생활을 하게 된다. 건륭 54(1789) 그는 69세의 나이로 병사했는데, 그는 재산을 거의 남기지 못해 후손들은 기본생활조차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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