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해외영토 개척에 적극 참여한 벨저가문
스페인 해외영토 개척에 적극 참여한 벨저가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6.13 16: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벨저가문①…푸거 가문과 경쟁, 베네수엘라 식민지 할당

 

벨저 가문은 16세기에 합스부르크 왕가에 자금을 제공하며 부를 쌓았다. 벨저 가문은 푸거 가문과 함께 독일 남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본거지를 두었으며, 두 가문은 치열하게 경쟁하며 스페인의 파산과 함께 동시에 몰락했다. 푸거 가문이 유럽에 치중했다면 벨저 가문은 스페인의 해외 식민활동에 주력했다.

 

벨저가 문장 /위키피디아
벨저가 문장 /위키피디아

 

벨저 가문(Welser family)의 뿌리는 동로마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500~565))의 후손으로 파악된다. 벨저라는 이름이 아우크스부르크의 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46년으로, 푸거 가문보다 120년 앞섰다.

벨저 가문이 두각을 나타난 것은 15세기였다.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äus)와 루카스(Lucas) 형제가 무역업에 뛰어들어 남독일, 이탈리아, 안트워프, 런던, 리스본 등지에 지점을 개설하고, 지중해 동부 레반트 지역까지 영업을 확장했다. 이 시기에 벨저가 거래한 상품은 면직, 능직(혼방직), 향신료, 비단 등이었고, 광산업과 직물 생산에도 참여했다. 또 금융업에도 참여해 이탈리아 메디치가와 거래하기도 했다.

루카스의 아들 안톤(Anton)1479년에 독일의 부유한 상인 푈린(Vöhlin)가에 데릴사위 격으로 장가를 갔다. 그는 푈린가와 공동 출자로 회사를 차리고, 20여명의 출자자를 참여시켜 자본금을 키웠다.

바야흐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개척이 속도를 더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국의 후원을 받아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했고, 포르투갈의 바스코다가마는 1497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향로를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안톤은 바스코다가마(Vasco da Gama)의 항해에 투자해 인도 항로 개척에 기여했다. 신대륙 개척은 돈이 되었다. 인도 무역은 현지에서 향신료를 싸게 사서 유럽에 비싸게 팔았다. 벨저가는 15세기말까지만 해도 푸거가보다 선두의 위치에 있었다.

 

1516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Carlos I)가 스페인 왕에 올랐다. 합스부르크가는 당시 오스트리아, 플란더스(네덜란드, 벨기에), 나폴리왕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이 사망하면서 차기황제 선거를 놓고 합스부르크의 카를로스와 프랑스왕 프랑수아, 영국왕 헨리 8세가 경쟁했다. 이때 벨저 가문은 푸거 가문과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당선에 금전적으로 지원했다. 돈의 힘으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Karl V)로 등극한다.

스페인 국왕이 황제가 되기 위해 7명의 선제후에게 준 뇌물의 총액은 모두 85만 길더로 집계되었다. 이중 푸거 가문의 몫은 55만 길더, 웰저 가문이 15만 길더를 맡았고, 나머지는 이탈리아 3개 은행에게 돌아갔다.

벨저는 황제에게 돈을 빌려준 무게에서 푸거에게 밀렸고, 이때부터 푸거가문에 선두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대신에 벨저는 스페인의 대외 팽창에 자금을 집중시켰다. 역사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지만, 벨저 가문이 없었다면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확장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란 견해가 유력하다.

 

벨저가가 베네수엘라 원정대에 보낸 갈레온선 /위키피디아
벨저가가 베네수엘라 원정대에 보낸 갈레온선 /위키피디아

 

푸거 가문은 카를 5세에게 너무 많은 돈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야코프 푸거가 죽은후 조카 안톤 푸거는 합스부르크에 대한 대출을 줄었다. 이에 합스부르크는 푸거 가문이 거절한 자금의 빈 자리를 벨저에게 떠넘겼다. 1522년부터 1532년까지 벨저가가 카를 5세에게 지불한 신용대부가 23건에 이르렀다. 벨저가도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대출이 위험수위에 올랐음을 직감하고 카를 5세의 수중에 있는 스페인의 해외사업으로 투자방향을 돌렸다.

벨저가는 당시 최대무역 거점이었던 안트워프(벨기에)에 지점을 세우고, 스페인 세비아에도 영업소를 개설했다. 이어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 섬의 산토도밍고(현재 도미니카공화국 수도)에도 무역거점을 만들었다.

벨저가는 1526년부터 1535년까지 93척의 선단을 갖추고 스페인과 서인도제도 사이에 교역에 참여했다. 벨저가 그 항로에서 차지한 점유율은 10%에 달했다.

 

베네수엘라 식민지 /위키피디아
베네수엘라 식민지 /위키피디아

 

벨저가문이 아메리카 무역에 관심을 보이자, 1528년 카를 5세는 벨저 가문에 황제선거에서 진 빚을 갚는 조건으로 아프리카 노예무역권과 남미 베네수엘라의 총독권을 주었다. 총독권은 영토의 지배권을 주는 것을 의미했다. 노예무역은 수지가 맞는 장사였지만 베네수엘라 총독 자리는 그다지 큰 매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급변했다. 1522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의 아즈텍을 정복하고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빼앗아 카를 5세에게 바쳤다. 1534년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무너뜨리고 황금을 실어 갔다. 이 황금은 유럽이 500년 동안 채굴한 귀금속 전체를 합친 것에 맞먹었다.

탐험가들은 흥분에 빠졌다. 아메리카엔 금이 무진장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 엘도라도(El Dorado)라는 왕이 있는데, 그 왕이 대관식을 하는 동안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가로 뒤덮인다는 소문도 있었다.

 

바르톨로메우스 5세 벨저 /위키피디아
바르톨로메우스 5세 벨저 /위키피디아

 

벨저가는 처음에 베네수엘라를 작은 베네치아’(Klein-Venedig)라고 부르며 무역 거점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도라도에 관한 무성한 소문을 듣고는 벨저가의 수장인 바르톨로메우스 5(Bartholomäus V)도 황금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벨저는 베네수엘라에 15만 길더를 투자했다. 카를 5세 황제선거에 투자한 돈에 버금가는 액수였다. 이 돈은 벨저에겐 적지 않은 돈이었다.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우선 총독부터 구했다. 초대 총독으로 해군 대령 출신의 독일인 암브로시우스 알핑거(Ambrosius Alfínger)를 지명했다. 알핑거는 15292300명의 용병을 이끌고 베네수엘라에 도착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물리치고 코로(Coro)와 마라카이보(Maracaibo) 두 곳에 식민기지를 건설하고 코로를 수도로 삼았다. 알핑거 일행은 베네수엘라 식민지 개척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머리에는 온통 황금 뿐이었다.

그들은 원정대를 조직했다. 원정대는 스페인어로 엔트라다(Entrada)라고 불렀다. 탐험과 정복이라는 의미의 엔트라다는 현지 원주민에게는 재앙이었다.

15298월 알핑거는 첫 번째 엔트라다에 나섰다. 그는 탐색 도중에 인디언을 만난 것 이외에 금에 관해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다.

알핑거는 금은커녕 오히려 말라리아에 걸렸다. 그는 치료차 배를 타고 산토도밍고로 건너가면서 자리를 비운 동안에 자신이 데리고 온 대원 가운데 니콜라우스 페더만(Nicolaus Federmann)으로 하여금 식민도시를 관리하도록 위임했다.

페더만도 금을 찾고 싶었다. 총독이 치료차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19309월에 유럽인 용병과 원주민을 합쳐 220여명으로 오리노코 강 유역을 탐사했다. 그의 탐사는 총독의 지시를 받지 않은 행동이었다. 페더만도 금을 찾지 못하고 부하 절반이 열병에 걸려 더 이상 행군을 할수 없게 되자 코로로 돌아왔다.

산토도밍고에서 치료를 받던 알핑거가 페더만의 원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금은 자신이 발견해 독차지하려 했는데, 부하가 독단적으로 탐험에 나섰기 때문이다. 알핑거는 페더만을 해고하고, 베네수엘라에서 추방했다. 벨저의 베네수엘라 식민지는 현지 파견부대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다음으로 계속)

 


<참고자료>

Wikipedia, Welser family

Wikipedia, Klein-Venedig

Wikipedia, Ambrosius Ehing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