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저가, 스페인에 베네수엘라 식민지 빼앗기다
벨저가, 스페인에 베네수엘라 식민지 빼앗기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6.1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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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저가문③…엘도라도 발견 못하고 아들도 사업도 잃었다

 

이탈리아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1451~1512)가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 호수를 둘러보고 베네치아와 닮았다고 해서 그 일대를 작은 베네치아’(Little Venice)라고 불렀다. 이탈리아어로 Veneziola였는데, 스페인어 버전으로 베네수엘라(Venezuela). 독일의 벨저가가 1528년 카를 5세에게서 베네수엘라 식민지 경영권을 양도받고 독일어 버전으로 클라인베네디크(Klein-Venedig)라고 했다.

1546년에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벨저가에 준 베네수엘라 경영권을 환수했다. 독일 벨저가의 베네수엘라 통치는 18년에 불과했다. 벨저는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의 속임수에 넘어 갔다. 황제가 벨저가에게 빌린 돈을 갚는 조건으로 주었다가 베네수엘라에 엄청난 황금이 묻혀 있을 것이라 여겨 다시 빼앗은 것이다.

벨저가의 수장 바르톨로메우스 5(Bartholomäus V)는 베네수엘라를 뺏기는 과정에서 외아들(6)마저 잃었다. 엄청나게 투자한 돈도 날려버렸다. 푸거가와 함께 15~16세기에 유럽 금융계를 쥐고 흔들었던 벨저가가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는 베네수엘라였다.

 

엘도라도를 찾아 나서는 벨저가 원정대. 오른쪽이 게오르크 호어무트, 중간이 필리프 폰 후텐. /위키피디아
엘도라도를 찾아 나서는 벨저가 원정대. 오른쪽이 게오르크 호어무트, 중간이 필리프 폰 후텐. /위키피디아

 

엘도라도(El Dorado)라고 믿었던 보고타(현재 콜롬비아 수도)는 스페인 탐험대와 벨저 가문의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1540년 카를 5세는 보고타 일대를 스페인 영토로 규정했다. 보고타에는 소문만큼의 금이 없었는다.

바르톨로메우스 5세는 베네수엘라 총독 게오르크 호어무트가 죽자, 후임에 필리프 폰 후텐(Philipp von Hutten)을 임명했다. 바르톨로메우스는 1540년 그동안 투자한 금액 일부만이라도 회수하기 위해 다시 원정대를 조직했다. 이 원정대는 벨저가로는 7번째이자 마지막 원정이었다. 원정대에 외아들인 바르톨로메우스 6세가 참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바르톨로메우스 5세 /위키피디아
바르톨로메우스 5세 /위키피디아

 

총독 후텐은 바르톨로메우스 6세와 함께 200명의 원정대를 꾸렸다. 후텐과 바르톨로메우스는 앞서 호어무트의 원정에도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원정대는 베네수엘라 어딘가에 엘도라도가 있을 것으로 믿고 산과 강을 헤메고 다녔다.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고 풍토병에 걸리면서 대원수는 점점 줄어 들었다.

후텐이 원정에 나서 코로 기지를 비워 놓았을 때 스페인 장교 후안 데 카르바할(Juan de Carvajal)이 기지를 점령했다. 카르바할은 원래 주인이 나타나면 자신의 지위가 상실될 것을 우려해 스페인 아메리카 본부가 있는 산토도밍고(현재 도미니카공화국 수도)에 총독 임명장을 내려달라고 했다. 스페인은 남미 알짜배기 땅에 독일인 식민지가 있는 것이 불쾌했을 것이다. 산토도밍고의 스페인 식민 당국은 1545년 독일 총독이 실종되었을 것이란 명분을 내세워 카르바할에게 베네수엘라 총독 임명장을 주었다.

 

필리프 폰 후텐(왼쪽)과 후안 데 카르바할 /위키피디아
필리프 폰 후텐(왼쪽)과 후안 데 카르바할 /위키피디아

 

후텐과 바르톨로메우스는 5년 동안 미개척지를 탐색했지만 금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원들은 지치고 병들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그들은 코로 기지로 돌아가기로 했다. 1546년 후텐 일행이 코로에서 100마일쯤 접근했을 때 갑자기 스페인 병사들이 나타났다.

후텐과 젊은 바르톨로메우스가 살아서 돌아오자 카르바할은 당황했다. 카르바할은 당연히 총독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야 했다. 돌아온 사람은 30여명에 불과했다. 카르바할은 저 정도면 제압할수 있다고 판단했다.

불법 점거자들이 폭력을 행사했다. 카르바할은 스페인 병사들에게 독일 대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기습을 당하자 바르톨로메우스는 칼을 빼들어 카르바할을 내리쳤다. 카르바할은 부상을 입었다.

카르바할은 독일인들에게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후텐과 바르톨로메우스는 남은 대원을 이끌고 코로 항구로 이동했다. 그런데 등 뒤에서 카르바할의 병사들이 그들을 덥쳐 체포했다. 후텐과 바르톨로메우스는 쇠사슬에 묶여 며칠을 보냈다. 카르바할은 이 귀챦은 손님들을 살려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1546517일 밤, 스페인 병사들은 후텐과 바르톨로메우스를 참수했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아들의 끔찍한 사망 소식을 들은 아버지 바르톨로메우스 5세는 더 이상 베네수엘라 사업을 영위할 욕구를 상실했다. 그러던 차에 스페인 국왕 카를 5세는 벨저 가문에 준 베네수엘라 특허장을 회수했다.

벨저가문은 18년간 베네수엘라를 경영하면서 300만 플로린에 달하는 어머어마한 돈을 날려버렸다. 벨저는 이후 서서히 기력을 잃어갔다.

 

필리피네 벨저 /위키피디아
필리피네 벨저 /위키피디아

 

바르톨로메우스 5세는 이젠 합스부르크에 매달리지 않았다. 카를 5세가 독일 개혁파 신도와 전쟁을 벌일 때 벨저는 자금지원을 거부했다. 오히려 합스부르크의 원수였던 프랑스 왕가에 돈을 빌려줘 카를 5세에게 복수했다.

벨저가는 카리브해에 노예무역에도 참여했다. 벨저는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투입해 산토도밍고에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고, 설탕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벨저가가 노예 무역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수송한 아프리카 흑인이 수천명이 되었다고 한다.

 

벨저가의 사업은 1557년 스페인의 파산으로 결정타를 입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돈을 빌려주고 받은 국채가 폭락하면서 스페인에서 하던 사업을 접어야 했다. 안트워프의 사업도 정리했다.

벨저 가문은 후대에 가면서 푸거가문처럼 사업에 열의를 잃었다. 후손들은 벌어 놓은 돈을 쓰는데 만족해 했다. 후손들은 기업가보다는 정치인이 되는 것을 선호했다. 벨저가는 1550~1614년 사이에 뉘른베르크와 아우크스부르크에 여러명의 시장을 배출했고, 시정에 주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벨저가문은 카를 5세가 죽은 후에 합스부르크와 관계를 복원했다. 바르톨로메우스의 조카딸 필리피네(Philippine)는 카를 5세의 손자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페르디난트 2세와 결혼했다.

 

벨저가의 마지막 남은 사업은 유럽에서 향신료를 거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업도 1614년에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벨저 가문은 독일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다. 그러다가 19세기말 독일 제국이 뒤늦게 영국과 프랑스가 선점한 해외식민지 경쟁에 뛰어들면서 벨저 가문의 베네수엘라 식민지 개척 스토리가 소환되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권 시기에도 벨저 가문은 독일의 과거 영광을 재현하는데 활용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Bartholomeus VI. Welser

Wikipedia, Juan de Carvajal

Wikipedia, Philipp von Hutten

Wikipedia, Welser family

Wikipedia, Bartholomeus V. Welser

게랄트 브라운베르거 등, “세계를 움직인 돈의 힘”, 현암사, 2010, P5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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