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링 은행에게 아르헨티나는 무덤이었다
베어링 은행에게 아르헨티나는 무덤이었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6.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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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링가②…미국 루이지애나 매입에 참여, 아르헨티나 투자로 위기

 

1803년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영토를 매입했다. 이 땅은 멕시코만에서 시작해 북서쪽으로 로키산맥의 미시시피강 지류까지 뻗어 있다. 면적은 214으로, 스페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을 합친 정도의 규모였고, 미국 독립 당시보다 두배나 넓었다.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판 것은 스페인과 영유권 분쟁에 휩싸여 있는데다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프랑스 권력은 야심만만한 나폴레옹이 잡고 있었다.

 

루이지애나 영토 /위키피디아
루이지애나 영토 /위키피디아

 

가격은 1,500만 달러였다. 지금 가치로 계산하면 얼마되지 않은 액수(26억 달러)이지만, 당시 미국은 이 거액을 마련할 여력이 없었다. 일단 선금으로 국고에서 300만 달러의 금을 꺼내 지불했고, 나머지는 국채발행으로 충당할 작정이었다.

독립한지 20여년 지난 시점에 미국의 금융시장이 취약했다. 미국은 당대 최대금융시장인 런던 시티에 국채발행을 의뢰했다. 처음에 버드, 세비지&버드’(Bird, Savage & Bird)라는 런던의 머천트 뱅크에 문의했다. 이 은행은 파산위기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일찍이 손을 떼고 베어링과 협상했다.

영국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매각자금을 군비로 사용할 것이 분명했다. 적국의 군자금을 마련해 주는 일에 베어링이 나선 것이다. ]베어링은 국채 발생 수수료가 막대하다고 설명했다. 영국도 루이지애나 매각을 통해 미국을 중립화시킬수 있다고 판단해 베어링의 중재를 허용했다.

알렉산더 베어링 /위키피디아
알렉산더 베어링 /위키피디아

이 무렵 베어링 은행의 창업자이자 수장인 프랜시스의 나이는 63. 그는 아들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맏아들 토머스에 경영을 맡기고, 루이지애나 매입건은 둘째 알렉산더를 파리에 보내 협상하도록 했다. 알렉산더는 프랑스과 미국 재무부 담당자와 협상을 벌였다. 협상 결과는 국채 액면가 100달러당 87.5 달러로 인수하는 조건이었다. 12.5%의 수익률을 보장하는 이 사업에 베어링 은행은 미국 국채를 소화했다.

알렉산더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국채를 싣고 프랑스에 건네줬다. 미국 국채 매각에는 네덜란드의 호프사와 함께 했다. 프랜시스는 나는 이 일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내 일생에 이렇게 신경을 써본 일이 없다.”고 했다.

프렌시스는 루이지애나 매각 건을 성사시킨 후 은행을 아들들에게 일임했다. 1807년 프랜시스는 자신의 지분을 토머스, 알렉산더, 헨리에게 넘겨주고, 회사 이름을 프랜시스베어링(Francis Baring & Co.)에서 베어링브러더스(Baring Brothers & Co.)로 바꿨다. 2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8109월 프랜시스는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12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베어링은 영-미 전쟁에 미국에 자금을 지원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매국노와 같은 행동이었지만, 베어링은 정부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에서 자금을 운영했다. 당시 프랑스의 리슐리외 공작(Duc de Richelieu)유럽에 여섯 개의 강대국이 존재한다.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베어링 형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베어링 형제는 런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과시했다. 베어링 가문은 영국 귀족과 깊은 인연을 맺었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렇지만 이런 인맥들이 은행 이익과 배치될 때에는 은행을 우선했다.

 

베어링 은행은 점점 거만해 지기 시작했다. 오만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1820년대에 몇건의 투자 실패로 베어링은 로스차일드에게 선두주자 자리를 내줘야 했다. 대신에 베어링 은행은 해외로 진출했다. 미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1843년 미국 정부의 독점 대리인 자격을 딸수 있었다.

1888년에 베어링은행은 기네스 맥주의 상장을 주선했다. 이때 베어링은 기네스 주식의 대부분을 가문과 은행에 배분했다. 이익을 나누지 않고 가문이 독점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베어링은 점점 신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베어링가문의 문장 /위키피디아
베어링가문의 문장 /위키피디아

 

베어링 은행의 무모함은 1890년 이른바 베어링 위기’(Baring crisis)로 정점에 도달한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모처럼 세계적으로 큰 전쟁이 없었다. 프랑스에선 이 시대를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불렀다. 유럽과 미국에선 산업이 발달하고 금융회사들은 돈을 많이 벌었다. 금리가 내려갔고, 위험성 있는 투자대상에 돈이 몰렸다. 런던은 세계금융중심지였다. 런던 은행들은 러시아에서 캐나다, 남미로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나섰다. 영국 자본수출은 1890년에 8,000만 파운드로, 당시 영국 GDP5.5%에 달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높은 수익을 제공할 것처럼 보였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초원(팜파스)은 밝은 미래를 제시했다. 영국은행들의 해외투자 가운데 40~50%가 아르헨티나에 집중했고, 그 중 베어링 은행이 아르헨티나 투자를 선도했다. 1880~1890년 사이에 베어링은 무려 1,360만 파운드를 아르헨티나에 쏟아부었는데, 그 다음 순위의 은행은 450만 달러에 불과했다. 1890년 무렵에 베어링의 대출 가운데 4분의3이 아르헨티나와 우르과이에 쏠려 있었다. 베어링의 투자 덕분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경제에는 거품현상이 빚어졌다.

 

1890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그림) /위키피디아
1890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그림) /위키피디아

 

1888~1889년 런던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경제적 충격이 왔다. 1889년 영국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2.5%에서 6%로 인상했다. 급격한 금리인상은 신흥국의 채권 발행을 어렵게 했다.

이런 와중에 18907월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선 시민 혁명운동이 일어났고, 곧이어 정권이 교체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지급불능상태가 되어 갔다.

1890년 베어링 은행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하수도 회사(Buenos Aires Water Supply and  Drainage Company)의 공모주를 대량으로 발행했는데, 유럽에서 그 주식을 아무도 매입하려 하지 않았다. 금융시장에 대혼란이 왔다. 남미 국가의 국채 수익률은 800bp나 뛰어 정크본드로 추락했다. 아르헨티나에 집중투자했던 베어링 은행도 파산의 위기에 처했다.

1890118일 베어링의 수장 에드워드 베어링이 윌리엄 리더데일(William Lidderdale) 영란은행 총재를 방문해 지원을 요청했다. 런던금융가 시티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전까지 은행이 파산할 경우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구제금융을 준 적이 없었다. 망하면 은행이 홀로 파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베어링은 덩치가 너무 컸다. 이 은행이 파산하면 런던은 물론 세계 금융시장이 붕괴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재무장관의 보고를 듣고 일기에 베어링 파산 가능성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영란은행이 개입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이 있다고 한다. 다수의 은행은 물론 수많은 국민들이 파탄난다고 한다.”라고 썼다. 로스차일드의 수장 네이선 로스차일드(Nathan Rothschild)구제금융이 없다면 런던 금융시스템이 붕괴되고, 경제적 대재앙을 유발할 것이라고 했다.

 

중앙은행 총재 리더데일은 로스차일드을 비롯해 런던 주요 은행들과 구제금융을 준비했다. 우선 영란은행은 800~900만 파운드의 유동성을 베어링에 공급해 급한 자금을 메우도록 했다. 또 로스차일드 등 주요은행들에게 자금을 갹출해 1,710만 파운드의 보증기금을 조성하고, 베어링의 자산을 정리케 햇다. 베어링 은행은 우량자산과 불량자산을 구분해 불량자산은 처분하고 우량자산만으로 유한회사로 전환했다. 새 은행의 지배구조는 과거처럼 베어링 가문이 절대적 권한을 행사할수 없도록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베어링은 다시 태어났다. 베어링은 더 이상 영국의 주도적 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5~6위권으로 밀려났다. 베어링 위기로 인해 영국은 2년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으며, 아르헨티나는 10%대의 침체에 빠졌다. 베어링에 대한 자금지원은 정부와 중앙은행의 구제금융의 나쁜 선례를 남겼다. 1998년 미국의 LTCM 구제금융과 2008년 은행 구제금융은 베어링의 학습효과에서 나온 것이다. (다음으로 계속)

 


<참고자료>

Wikipedia, Barings Bank

Wikipedia, Sir Francis Baring, 1st Baronet

Wikipedia, Baring crisis

Asha Banerjee, The First Modern Bailout: The Barings Crisis of 1890 and the Bank of Eng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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