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오 꾸엔, 중국 지배 끝내고 베트남 독립 성취
응오 꾸엔, 중국 지배 끝내고 베트남 독립 성취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6.2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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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사②…수시로 침공하는 중국군 격퇴, 명나라에 21년간 점령되기도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이 분열되었다. 화북지역에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5왕조가 교체하고, 화남지방에는 10개 지방정권이 들어섰다. 베트남의 교지(交趾)는 화남 지방의 남한(南漢)에 속해 절도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중국의 분열은 베트남 독립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교지 지역에 응오 꾸엔(Ngô Quyền, 吳權)이란 토착 무장이 세력을 확장했다. 남한왕 유공은 938년 아들 유홍조(劉弘操)에게 군사를 주어 응오 꾸엔을 격퇴하도록 했다.

웅오 꾸엔은 하롱베이 근처 바익당강(Bạch Đằng, 白藤江) 어귀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강바닥에 수많은 쇠말뚝을 박아 두었다. 곧이어 유흥조의 중국군대가 베트남 연안에 도착했다. 응오 꾸엔은 수군에 퇴각명령을 내렸다. 남한군은 도망치는 응오 꾸엔의 수군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후 썰물이 시작되었다. 유홍조의 남한군은 쇠말뚝에 걸려 오도가도 못했다. 응오 꾸엔은 미리 매복해 두었던 군사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남한군은 전멸하다시피했고, 남한의 왕자 유홍조도 사망했다.

이듬해인 939년 응오 꾸엔은 더 이상 중국이 내려주는 절도사를 거부하고, 왕을 칭했다. 이로써 베트남은 BC 111년에서 939년까지 1,050년 동안의 중국 지배를 벗어 버리고, 독립했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그 틈에 베트남은 독립을 성취했다.

 

응오 꾸엔이 바익당강에서 중국 남한군을 격퇴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응오 꾸엔이 바익당강에서 중국 남한군을 격퇴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중국은 자중지란 속에 베트남의 독립을 저지하지 못했지만, 중원이 다시 통일되어 힘이 강해지면서 호시탐탐 베트남을 침공했다. 송나라를 시작으로, 몽골(), , 청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 왕조는 베트남을 침공했다.

명분은 책봉이었다. 베트남 내부에 권력투쟁이 발생해 임금이 새로 즉위하면, 중국은 임금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침공했다. 그 이면에는 영토에 대한 야욕이 있었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960년 북중국에서 조광윤(趙匡胤)이 송()을 건국하고 971년 남한을 멸하면서 중국 남방의 과거 영토에 손을 미쳤다. 송은 베트남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한나라나 당나라처럼 베트남을 직접 지배 하에 두고자 했다.

기회가 왔다. 979년 베트남 왕실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국왕 딘 보 린 부자가 살해되고, 여섯 살의 어린 아들 딘 도안이 제위에 올랐다.

이에 송은 수륙 양군의 원정대를 보내 베트남을 침공했다. 명분은 베트남의 왕위 계승이 분봉(分封)의 예()에 어긋난다는 것. 내정 간섭이었다. 하지만 중국 천자는 번국의 책봉권을 행사했다.

레 호안(黎恒) 장군이 맞서 싸웠다. 딘 왕조의 일부 신하들은 송의 침입이라는 위기 속에 어린 황제를 폐위시키고 레 호안을 황제로 추대해 980년 그가 제위에 올랐다. 송나라 군대는 수륙 양군의 전략이 차질을 빚은데다 무더위로 인한 질병으로 고전했다. 게다가 북방에는 거란()의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했다.

송군이 철수한 이후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평화가 왔다. 그 사이에 레() 왕조가 물러나고 리() 왕조가 등장했다. 리 왕조를 세운 리 꽁 우언(李公蘊)은 수도를 하노이로 옮겨 탕 롱(昇龍)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송나라는 베트남을 포기하지 않았다. 1072년 리 왕조에서 어린 황태자이 제위(仁宗)에 올랐다. 송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송의 침공 기미를 눈치 챈 베트남이 먼저 공격했다. 10752월 베트남군은 수륙 양로로 광동성과 광서성을 일부 점령하고 수천명의 포로와 다량의 전리품을 노획했다.

그 보복으로 이듬해인 1076년 송은 베트남을 침공했다. 하지만 송군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북베트남의 꺼우강과 홍강에서 저항에 부딛쳐 오도가도 못했고, 게다가 병사들에게 질병이 번져 전의를 상실했다. 베트남군은 기습공격으로 송군에 큰 타격을 줬다. 서로 간의 타협이 형성됐다. 베트남축에서 포로교환과 일부 분쟁지역의 영토할양을 제공하는 댓가로 송군이 물러났다. 그후 베트남은 송나라와 조공과 책봉의 관계를 형성하며 평화와 균형을 유지했다.

 

몽골도 베트남을 침공했다. 그떼 베트남에는 쩐() 왕조 시기였다.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남송을 포위하기 위해 1253년 윈난성의 대리(大理)국을 멸망시키고 베트남과 국경을 접했다. 1257년 몽골군은 리 왕조에 사신을 보냈으나 대답이 없자 공격을 감행했다. 몽골군은 수도 탕 롱에 입성했다. 하지만 몽골군도 무더운 기후에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를 이용해 찐 왕조의 군대는 반격에 나서 몽골군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1279년 몽골군은 다시 베트남을 침공했다. 원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베트남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몽골은 베트남은 물론 남부의 참파까지 침공했다.

쩐 왕조는 저항했다. 베트남군은 살달(殺韃, 타타르를 모두 죽이리는 의미)이라는 두 글자를 몸에 새기고 저항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몽골군의 분노를 자극해 포로들이 집단 살육당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군은 오랜 전투로 인한 피로감, 베트남군의 게릴라전에 지쳐 2차 침공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28711월 몽골은 병력 8만명 선박 500척을 동원해 3차 공격을 단행해 수도를 점령했다. 그러나 군량을 실은 선단이 찐 왕조 수군의 공격과 풍랑으로 도착하지 못해 식량 부족의 상황에 놓였다. 무더운 날씨와 식량부족으로 몽골군은 침공 4개월만에 퇴각했다.

몽골의 3차례 침공으로 찐 왕조도 피해가 켰고, 원나라도 더 이상 베트남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두 나라는 조공·책봉 관계를 회복하며 일단 화평을 선택했다.

 

명군의 침공로 /위키피디아
명군의 침공로 /위키피디아

 

1368년 중국 대륙에서는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세웠다. 쩐 왕조는 중원의 새 정권의 무리한 조공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평화를 유지했다.

그런데 명에 착실하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던 레 왕조가 역성혁명에 의해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400년 호족 호 꾸이 리(胡季犛)가 왕위를 찬탈하고 레 왕조의 숨통을 끊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황으로 올랐다.

명나라가 베트남을 내지화할 좋은 명분을 찾았다. 1404년에 20만명의 명군은 찬탈자 호()의 죄를 벌하고 쩐()조를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을 침공했다. 호씨 정권은 치밀하게 항전 준비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내부의 유학자들이 호씨의 역성혁명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됐다. 외부의 강력한 침공에 내부가 분열되면 이길수 없다.

명군은 2개월 만에 수도를 점령하고, 1407년에는 호 꾸이 리 부자를 생포해 중국으로 압송했다. 명나라는 쩐 조를 부흥시킨다는 구실을 팽개치고 베트남을 내지화했다. 과거 천년동안 중국 땅인데 그곳에 독립이든, 준독립이든 왕조를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명나라의 침공 목적은 베트남 영토였다. 명은 베트남에 중국식의 통치 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비롯해 백성들의 복장 및 두발 모양새를 바꾸기까지 중국화를 추진했다.

명의 베트남 직접 지배가 시작되면서 베트남인들의 저항이 본격화됐다. 저항은 먼저 쩐 조의 잔여 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레 러이(黎利)는 베트남 북부 타인 호아의 호족 출신이다. 그는 한때 몰락한 쩐 왕조와 함께 저항 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 항복한 뒤 명 지배자로부터 말단 관직을 부여받고 명의 지배에 협조하던 사람이었다. 1418년 그는 명의 지배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각 부족의 궐기를 유도했다. 레 러이와 그의 저항군은 10여년에 걸친 항전 끝에 명의 지배를 종결시키고 1428년 새로운 레() 왕조를 수립했다. 이 전쟁에서 죽은 명나라 군대가 30만명이었다고 한다. 베트남은 독립 400년만에 중국의 명나라에 나라를 빼앗겼다가, 치열한 저항 끝에 21년만에 다시 독립을 쟁취한 것이다.

 

만주에서 발원한 청()나라는 초기에 남방의 베트남과 조공·책봉의 평화를 유지했다.

건륭제(乾隆帝) 시기인 1788, 베트남 남부의 떠이 썬(西山) 삼형제의 반란으로 레 왕조의 마지막 황제 찌에우 통 데(昭統帝)가 위태로운 운명에 처했다. 레 왕조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국경을 넘어 동 낀(東京)에 입성하고, 찌에우 통 데를 안남국왕에 봉했다. 하지만 이듬해초 반란세력은 수륙 양군을 이끌고 청군을 공격해 대혼란에 빠뜨렸다. 청군은 대패해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후 농민 반란세력인 떠우 썬조가 들어섰지만, 청나라는 그 세력을 인정했다. 곧이어 수립된 응우옌() 왕조도 청나라와 조공관계를 회복하면서 평화체제가 구축됐다.

이때 응우옌조는 나라 이름을 어떻게 할지를 청조에 물었다. 응우엔 왕조는 고대 국명인 남 비엣’(Nam Viet, 南越)로 할 것을 요청했지만, 청나라는 고대의 남 비엣이 중국 남부 광동·광서성을 포함한다고 하여 글자를 바꾸어 비엣 남(Viet Nam, 越南)이라고 하라고 했다. 응우엔조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지금의 베트남이라는 나라이름이 생겼다.

 


<참고자료>

Wikipedia, Battle of Bạch Đằng (938)

Wikipedia, History of Viet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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