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이家①…사무라이가 상인으로 변신하다
미쓰이家①…사무라이가 상인으로 변신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6.2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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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다카토시, 거상으로 부상…가문의 재산공유와 공동규칙 제정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로 막부를 옮긴후 일본은 안정되어 갔다. 농촌이 번영하고 산업이 발달했다. 도시에선 상업자본이 성장해 갔다. 전쟁이 사라지자 사무라이들도 상업에 뛰어들었다.

일본 미쓰이 재벌의 선조도 사무라이 가문이었다. 1616년 일본 중부 오미국(近江國) 사사키(佐佐木) 집안의 가신으로 살던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俊)는 가족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큰 평화가 우리 앞에 왔다. 쇼군이 에도를 다스린다. 우리는 더 이상 칼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고상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것으로 알았다. 나는 청주를 빚고 간장을 만들겠다. 우리 일은 잘 풀릴 것이다.”

 

다카토시는 칼을 내려놓고 지금의 미에현(三重) 마쓰사카(松阪)에서 상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양조장을 열어 청주를 빚고, 전당포(質屋)를 개설했다. 양조장 상호는 에치고야(越後屋)였다.

다카토시는 선견지명이 있었지만, 사업가로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는 일찍 죽고, 장남이 가업을 이어받았다. 장남은 사업이 서툴렀고, 상인의 딸이었던 어머니 슈호(殊法)가 사업을 도맡아 운영했다. 슈호는 아들 넷, 딸 넷을 혼자서 키웠다. 그중 넷째 다카토시가 사업적 재능이 두드러졌다.

슈호는 사업을 확장해 막부의 수도 에도(江戶)에 포목점을 열었다. 에도 점포에는 형제들이 함께 근무하고, 어머니는 마쓰사카를 지켰다.

 

미에현 마쓰사카에 있는 미쓰이가의 발상지 /위키피디아
미에현 마쓰사카에 있는 미쓰이가의 발상지 /위키피디아

 

넷째 아들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 1622~1694)는 형들과 함께 에도 에치고야에서 일하면서 상업을 견습했다.(아버지 高俊와 아들 高利는 발음이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그는 형들 밑에서 두 번째 점포를 내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형들은 막내의 상술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어머니가 아픈 것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다카토시는 형제의 위계질서를 존중해 마쓰사카로 돌아와 노모를 간병했다. 나이 28세였다. 1673년 맏아들(高次)이 사망하자 노모는 막내 다카토시에게 에도에서 포목점을 열라고 허락했다. 이때 다카토시의 나이는 51세였다.

23년간 숨죽이고 살았던 다카토시는 날개를 단 것처럼 자신의 뜻대로 사업을 펼쳐나갔다. 그는 아버지의 상호를 그대로 물려받아 에치고야(越後屋)라는 이름으로 포목점을 열었다. 점포는 9(2.7m) 크기로 작았고 후발주자였지만, 그는 기존의 상거래 방식을 타파했다.

다카토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정찰거래를 시도했다. 당시 에도 상가에는 가격표를 제시하지 않았다. 처음 오는 손님이나 부자들에겐 비싸게 팔았고, 단골손님에겐 싸게 파는 게 관행이었다.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는 이런 상관행을 깨고 가격표를 제시하면서 고객의 신뢰를 얻었다.

그는 옷을 비싸게 팔려고 하지 않았다. 비싸게 팔면 건당 수익은 올라 가지만 많이 팔수는 없다. 그는 박리다매(薄利多賣)의 개념을 도입해 싼 옷감을 많이 팔아 이윤을 내는 방식을 취했다.

또 부분 판매를 단행했다. 주변 포목점들은 옷감을 1(12m) 단위로 팔았지만 그는 절반 또는 그 이하로도 잘라 팔았다. 1촌이든, 1척이든 판다는 그의 전략은 다양한 옷감을 사용해 멋을 부리고 싶어하는 소비자층에 주효했다.

다카토시는 기성복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옷을 미리 만들어 가게 앞에 진열하면 고객들이 자기 치수에 맞은 옷을 골라갔다. 급히 옷을 입어야 하는 사람은 기성복을 사게 되었고, 그 수요가 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그는 현금거래를 정착시켰다. 외상거래는 계급이 높은 사람들에게 떼이기 십상이었다. 그는 귀족을 상대로 하지 않고 평민을 고객으로 삼았기 때문에 현찰 거래가 가능했다. 거드름을 피우며 외상으로 가져가려던 귀족들은 그의 가게에서 수모를 당해야 했다. 현찰거래는 정찰제를 가능케 했고, 외상대금이 떼여 자금난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그는 또 부유층을 찾아다니며 옷을 팔거나 자택에 배달하는 기존의 방식을 타파했다. 이런 고비용의 판매방식을 포기함으로써 그는 경쟁업체에 비해 싼 가격을 제시할수 있었다.

다카토시는 현대식 개념의 광고도 활용했다. 그는 고객들에게 전단지를 뿌리고, 미쓰이 로고가 새겨진 우산을 선물로 주었다.

다카토시의 파격적인 판매혁신은 경쟁자들의 질투를 유발했다. 에치고야의 점원이 경쟁사 동료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고, 점포 앞에 분뇨가 뿌려지고 방화로 점포가 불타 이사하기도 했다.

 

에도시대 미쓰이가문의 저택 그림 (富嶽三十六景) /위키피디아
에도시대 미쓰이가문의 저택 그림 (富嶽三十六景) /위키피디아

 

다카토시는 옷가게에서 번 돈으로, 1683년 에도(도쿄), 1686년 교토에 환전소를 열었고, 1691년에는 오사카에도 진출했다. 세 도시는 일본의 권력과 상업을 포괄하는 중심도시였다.

당시 막부는 직할영지의 세금과 지방영주들의 상납금을 금과 은으로 바꿔 에도로 운반했는데, 도중에 강도에게 빼앗기거나 풍랑에 배가 좌초되어 돈이 유실되는 경우가 있었다. 또 금과 은의 가치가 수시로 바뀌어 환차익이 생기거나 손실이 발생했다.

다카토시는 막부에 자금 수송을 대행하겠다고 제안했다. 1590, 막부는 다카토시와 에치고야의 평판을 좋게 보고, 미쓰이에 어용자금 수송 업무를 허용했다. 조건은 미쓰이 오사카 지점이 막부의 어용금고에서 은화를 받아 2~5개월후에 에도에서 금화로 납입하는 것이었다. 미쓰이 환전소는 막부 자금 거래에서 이자를 얻지는 못했다. 다만 막부의 막대한 어용자금을 상품 거래에 활용함으로써 이득을 챙겼다. 다카토시는 오사카에서 막부의 자금으로 싸게 옷감을 샀고, 에도 매출로 막부에 금을 갚았다.

막부의 현금수송업을 맡음으로써 미쓰이가는 막부의 어용상인이 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금융업에 진출하게 되었다. 미쓰이의 어용자금 환금 업무는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소멸될 때까지 이어졌다.

 

다카토시는 당대에 사업을 크게 일구었다. 그는 임종에 가까워지면서 자신의 사업을 후대에까지 이어나갈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아들 적자 10명과 서자 1명을 두었다. 그는 재산을 장자 모두에게 주거나, 많은 아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재산이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산을 가족 전체의 공유재산으로 만들되, 장자가 본가를 지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1694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에치고야 에도본점 그림 /위키피디아
에치고야 에도본점 그림 /위키피디아

 

다카토시의 장자 미쓰이 다카히라(三井高平)는 아버지의 유언을 정리해 1710년에 미쓰이 오모토카타(三井大元方)을 설립했다. 오모토카타는 미쓰이가문의 자산을 관리하는 지주회사 격인데, 일본식 자이바츠(財閥)의 원형을 이룬다.

오모토카타는 미쓰이 가문의 모든 자산을 관리하고, 각 점포에 자본금을 출자했다. 각 점포는 6개월마다 이익금의 일부를 모기업인 오모토가타에 납부한다. 미쓰이 후손은 각 점포에서 나는 이득을 개별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기업에서 나오는 보수로 생활을 한다. 오모토가타는 미쓰이 자본의 집결지이며, 최종 대부자 기능을 했다.

다카히라는 일족이 지켜야 할 규칙도 제정했다. 종축유서(宗竺遺書)라 불리는 가문의 규정은 50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일족의 자제에게 허드렛일부터 시켜 업무를 익히게 한다 본점이 전 점포의 회계를 장악한다 현명하고 유능한 자는 승진시키고 신입을 채용한다 사업에 맺고 끊는 게 중요하다, 아니다 싶으면 손을 털고 나온다 영주(다이묘)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어쩔수 없는 경우 소액으로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미쓰이 가문은 재산의 공동관리와 공동 규약 이행을 통해 번창했다. 그들은 항시 상인임을 잊지 말라는 가훈을 지켜 나갔다. (다음으로 계속)

 


<참고자료>

Wikipedia, 三井家

Wikipedia, 三井高俊

Wikipedia, 三井高利

Wikipedia, 三井財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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