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왜가 있었나③…5세기말 완전 철수
한반도에 왜가 있었나③…5세기말 완전 철수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2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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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가장 괴롭히던 왜…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한반도에서 손 떼

 

시기 6세기 이전에 신라를 가장 많이 괴롭힌 나라가 왜였다.

<삼국사기>에는 시조인 혁거세 8년부터 왜의 침입 기사가 나온다. 왜와 관련한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무려 50차례 가까이 나온다. 이중 대다수가 침략 기사다.

신라를 괴롭힌 왜가 한반도 왜인지, 일본열도 왜인지에 대한 뚜렷히 구분하기 어렵다. 별도로 움직였을 때도 있었고, 서로 연락을 취해 공동으로 행동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에게 왜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다. 네차례나 수도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백성 1천명을 끌고 가는 침략 세력이었다. 임금의 동생을 볼모로 잡았고, 툭하면 대신의 딸을 왜왕에게 시집오라고 했다. 신라 임금이 왜의 공격을 받고 고민하는 장면을 <삼국사기>를 통해 들어 보자.

 

유례 12(295),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해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다. 백제와 도모해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홍권이 대답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늘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임금이 받아들였다.

 

흘해 37(346), 왜병이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했다. 또 진군해 금성을 포위하고 급하게 공격했다. 임금이 싸우고자 하자 이벌찬 강세가 말했다.

적은 멀리서 왔습니다.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으면 공격을 늦추어 그 병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임금이 받아들여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이 식량이 떨어져 물러가려 하니, 날쌘 기병으로 추격토록 해 쫓아버렸다.

 

실성 7(408), 임금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군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두고는 우리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일이 터지기 전에 먼저 정예 병사를 뽑아 적의 군영을 격파하고자 했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전쟁은 위험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어떠 하겠습니까?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니, 지세가 험한 곳에 관문(關門)을 만들고 적들이 오면 막아, 그들이 침입하여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다가 유리한 시기가 되면 나가서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은 끌어당기고 남에게 끌려 다니지는 않는 것이니, 최상책이라 하겠습니다.”

임금이 그 말에 따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왜의 공격에 신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수도인 금성을 지켜 농성하고, 왜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역습하는 수세적인 방법을 취했다. 신라는 물의 싸움(水戰)에 약했다. 임금도 이를 인정했다. 바다를 건너가 선제 공격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관문을 지켜 왜병이 수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냥 당하기만 하던 신라는 5세기 들어 해상 전략을 강화해 나갔다.

자비 임금은 즉위 6(463)에 담당관에 명해 전함을 대대적으로 수리케 하고, 지증왕 6(505)엔 선박이용의 제도(舟楫之利)를 정비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륙이 아니라, 해안에서 왜의 침공을 저지했다. 실성 14(415), 신라 수군이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512년 이사부 장군이 바닷길을 건너가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물을 두려워 하던 신라 수군으로선 엄청난 발전이며, 신라군에 바닷 싸움(해전)에서 자신감을 얻게 한 전투였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바닷가에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 불리는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 /사진=김현민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바닷가에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 불리는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 /사진=김현민

 

왜는 고구려와 신라의 힘이 강해지면서 서서히 한반도에서 빠져 나갔다.

한반도 왜의 첫 번째 타격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영락 10(400) 보병과 기병으로 무려 5만 병력을 보내 신라를 구원케 했다. 고구려군이 서라발에 이르러, 그곳에 가득한 왜군을 쳐 퇴각시키고, 왜의 동맹세력인 임나(任那)가야의 종발성(從拔城)까지 진군해 성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반도 왜는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것 같다.

두 번째 타격은 신라 이사부였다. 이사부는 지증왕 13(512) 우산국을 정벌하고, 동해 제해권을 쥐면서 동해안 일대에 대한 왜의 노략질을 차단했다. 아울러 이사부가 왜의 동맹세력인 금관국을 정벌해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자, 남해안 일대에 대한 해상 지배력도 확보하게 됐다.

신라가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게 되자, 열도와 한본도 왜 사이에 수송로가 끊기고, 이에 따라 한반도 왜는 퇴로 차단에 앞서 열도로 넘어갔다고 추측된다.

삼국사기에서 왜와 관련한 기사는 신라 소지왕 19(497), 백제 비유왕 2(428) 이후 사라진다. 5세기말쯤 한반도 왜가 거의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가고, 잔류한 왜인들은 백제, 나중엔 신라에 동화돼 간 것으로 보인다.

 

160년간 우리 사서에서 사라졌던 왜가 662년 다시 나타난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열도의 왜는 백제부흥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5만 수군을 동원해 상륙하려다 백마강(금강) 어귀에서 전멸했다.

 

문무왕 2(662), 손인사와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扶餘隆)은 수군과 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병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고 바닷물도 붉게 물들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에는 백강전투 장면을 짧게 소개하며,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덥고 백마강이 붉게 물들었다며 전투의 치열함을 짧게 표현했지만, <일본서기>에는 울분을 삼키며 백촌강 전투(白村江) 상황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백제부흥운동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왜는 더 이상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바꾸며 영토를 열도로 국한시켰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은 왜의 침입에 대비해 죽을 때 자기 무덤을 동해 바다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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