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이 선 왕조, 최초로 수립된 베트남 농민정권
떠이 선 왕조, 최초로 수립된 베트남 농민정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6.23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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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사④…평민 지지 업고 태국-중국군 격퇴, 농민황제 꽝 쭝 등극

 

베트남 역사에 떠이 썬(西山) 농민왕조(1778~1802)가 있었다. 농민운동으로 출발한 이 정권은 중국과 태국의 외세 침공을 막아내며 정권을 수립했다. 세계 최초의 농민혁명정권이라고 할수 있다. “부자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성공한 농민정권은 14년간의 단기로 끝났지만, 그 여운은 200여년후 베트남 공산정권으로 이어진다.

우리 역사의 동학농민운동(1894),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1850~1864)은 그 후에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앞서 일어난 독일의 농민전쟁(1524~1525)은 지도부가 없었고, 귀족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베트남에서 수립된 농민정권은 역사가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때는 18세기말. 베트남의 레() 왕조는 명목상 황제 지위를 유지하고, 북쪽은 찐()씨가, 남쪽은 응우엔씨()씨가 나라를 갈라 지배하며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백성들은 피폐했다. 인구가 늘어나 남부 신개척지로 유민이 밀려들었다.

베트남 중부 꾸이 년(歸仁) 떠이 선(西山)이라는 마을에 응우엔()이라는 성을 가진 3형제가 있었다. 이들 형제의 조상은 원래 베트남 북중부 응에안(乂安)주 출신으로, 원래의 성씨는 호()씨였다. 그들의 선조는 남부의 지배자 응우옌씨의 군대가 찐씨의 북쪽을 공격했을 때 포로로 잡혀 꾸이 년에 살았다. 할아버지기 응우옌 성의 부인을 두었는데, 아버지가 호씨를 버리고 어머니의 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남부 지배자와 반란자의 성이 모두 응우옌()이지만, 출신 배경이나 조상이 다른 사람들이다.)

 

떠이 선 농민군의 지도자 삼형제 동상 /위키피디아
떠이 선 농민군의 지도자 삼형제 동상 /위키피디아

 

반란의 두목은 삼형제중 맏형인 응우옌 반 냑(阮文岳)이다. 두 동생인 응우옌 반 르(阮文呂)와 반 후에(頑文惠)도 가담했다.

1771년 삼형제는 꾸이 년 산악지대에서 산적질을 했다.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 무리에 가담했고, 지방정부로는 골머리 아픈 존재였다. 그러던 중 1773년 반 냑을 비롯해 산적 무리들이 꾸이 년 주정부에 귀순을 요청했다. 속임수였다. 성주는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고 좋아하며 그들을 맞이해 감옥에 넣었다. 그날밤 산적 무리들은 감옥을 탈출해 성문을 열었고, 산적 무리들이 성내로 들어와 관군을 제압하고 꾸이 년 성을 함락시켰다. 역사가들은 삼형제의 고향을 본따 떠이 썬(西山) 운동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거병한 꾸이 년 지방은 또다른 응우옌씨기 지배하는 지역으로, 토지가 척박하고 소수 지주의 수탈이 심한 곳이었다. 떠이 썬 운동은 개혁성이 두드려져 농민들이 대거 가담했다. 세계 역사상 초유의 농민 정권은 이런 척박한 곳에서 출발했다.

농민 반란군은 남부 지배자 응우옌씨의 수도인 푸 쑤언을 향하다가 꽝 남성에서 응유옌 씨의 군대를 격파했다. 농민군은 중국인 상인 이재(李才) 세력과 손잡고 세력을 확대했지만, 응우옌 군대의 반격을 받아 더 이상 진출을 하지 못했다.

 

이때 농민군의 구원투수로 달려온 세력이 북쪽 지배세력인 찐()씨였다. 찐조는 호앙 응우 푹(黃五福)을 대장군으로 임명해 응우옌 정권과 전쟁을 선포했다. 100여년에 걸친 남과 북의 평화적 대치상태가 깨졌다. 응우옌씨의 남군은 찐씨의 북군과 농민 반란군 사이에 포위되었다. 북군은 농민군과 연합전선을 펴 1775년 남부 수도 푸 쑤언을 점령하고 응우옌씨를 궤멸시키기 위해 남진했다.

응우옌 왕실은 지금의 호치민시(구 사이공)인 쟈 딘(嘉定)으로 피신했다. 북부에 남아있던 태자 응우옌 푹 즈엉(頑福暘)은 반 냑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찐씨의 북군은 떠이 썬 반란군도 진압했다. 그러자 반란군 수괴 반 냑은 또 거짓말을 했다. 자신들이 응우옌씨 토벌의 선봉에 서겠다고 했다. 찐씨의 북군은 반란군 두목 반 냑의 항복을 받고 북쪽으로 회군했다.

 

그후 떠이 썬 농민군과 응우옌의 남군이 메콩강 델타 지대인 쟈 딘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반 냑은 동생 반 르를 쟈 딘으로 보내 한때 사이공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이내 반격을 받아 후퇴했다. 기나긴 공방전이 벌어졌다. 응우옌 가문의 명장 도 타인 년(杜淸仁)3,000명의 의병으로 동 썬(東山)군 조직해 떠이 썬(西山)군에 맞섰다.

이 무렵 떠이 썬과 연합했던 중국인 이재가 변심해 포로로 잡혔던 태자 응우옌 푹 즈엉을 탈출시키고, 그를 왕으로 내세워 쟈 딘 정권과 내전을 벌였다. 가뜩이나 남쪽 국경지대로 쫒겨나 있던 응우옌 가문에 내분마저 벌어졌으니, 전쟁의 성패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1777년 떠이 썬 군은 쟈 딘을 공격해 아버지인 응우옌 푹 투언과 아들인 푹 즈엉등을 잡아 죽였다. 응우옌씨 일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 구사일생. 남쪽 왕실에 생존자가 있었으니, 15세의 웅우옌 푹 아인(頑福映)이었다. 의병대장 도 타이넌의 동선군은 그를 왕으로 옹립했다. 이 푹 아인이 나중에 떠이 썬 왕조를 멸하고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웅우옌조를 열게 된다.

 

떠이 선 군의 진격로와 외세 개입 /위키피디아
떠이 선 군의 진격로와 외세 개입 /위키피디아

 

1778년 떠이 썬 농민운동의 두목 응우옌 반 냑은 참파왕국의 옛수도 비자야(지금의 후에)에서 왕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아직 북쪽의 레 황실과 찐의 세력을 인정하고, 응우옌씨의 옛 지배지역을 통치했다.

한편 응우옌가의 어린 왕 푹 아인은 아직 힘이 없었다. 모든 군권은 도 타인 년이 쥐고 있었다. 푹 아인은 권력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으로 도 타인 냔을 살해했다. 또 내분이 벌어졌고, 이 틈을 타 떠이 썬 군이 쳐들어와 웅우옌 군대는 궤멸하고 푹 아인은 도주했다.

1784년 푹 아인은 당시의 강국인 사이암(타이)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사이암 왕국은 4만명의 군대를 보내 떠이 썬 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 떠이 썬 군에선 반 냑의 막내동생 응우옌 반 후에가 대응했다. 이듬해 응우옌 반 후에는 떠이썬 군을 메콩강에서 패퇴시켰다. 푹 아인은 사이암의 패잔병과 함께 태국으로 망명길에 나섰다.

 

태국군의 지원을 받은 응우옌 푹 아인의 군대가 궤멸되자 떠이 썬 군은 일단 남쪽 전선이 안정된 것으로 판단했다. 이제 그들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떠이 썬 군은 복려멸정(復黎滅鄭)을 구호로 내세웠다. 레 황실을 보전하되, 찐씨를 멸한다는 것이었다. 떠이 썬 군의 북벌대장은 응우옌 반 후에가 맡았다. 그는 1786년 순식간에 베트남의 수도이자 찐씨의 근거지인 탕 롱(하노이)을 점령했다. 반 후에는 찐씨의 마지막 왕 찐 카이(鄭楷)를 생포하고 찐씨를 멸했다. 응우옌 반 후에는 베트남을 250년간 양분해 통치하던 응우옌과 찐씨 세력을 제거하고 통일한 것이다.

 

떠이 선 왕조의 꽝 쭝 황제 /위키피디아
떠이 선 왕조의 꽝 쭝 황제 /위키피디아

 

마지막 남은 것은 명맥만 남은 레 황실이었다. 떠이 썬은 레 황실의 보호를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당장 몰아낼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레 황실이 명분을 만들어 줬다.

레 황실의 입장에서 보면, 남부 출신의 농민병들을 믿을 수 없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황제 찌에우 통 데(昭統帝)는 궁궐을 탈출해 중국으로 도망쳤다. 황제는 청나라에 반란군을 응징하는 명분으로 출병을 요구했고, 청나라는 레 황제의 요청으로 20만 명의 군대를 출동시켰다.

떠이 썬 반란군에게는 더 이상 레 황실을 보호할 명분이 사라졌다. 178811월 웅우옌 반 후에는 황제로 즉위하고 꽝 쭝(光中)이라는 연호를 채택했다. 베트남인들 사이에 그는 꽝 쭝 황제로 알려져 있다.

 

청군과 떠이 선 농민군의 전투 (1788) /위키피디아
청군과 떠이 선 농민군의 전투 (1788) /위키피디아

 

청의 대군이 탕 롱을 점령했다. 그러나 곧이어 꽝 쭝 황제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떠이 썬 군은 청의 원정군을 궤멸시켰다. 떠이 선 농민군은 태국에 이어 중국군 20만명도 물리친 것이다. 오랜 라이벌이었던 중국과 태국의 군대를 모두 싸워 이긴 꽝 쭝 황제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떠이 썬 운동의 마지막 승자 응우옌 반 후에는 반란 초기부터 실시해 온 토지의 분배와 평민 출신들의 정치 참여, 남북 분열 시대의 종결, 그리고 남북으로부터 들어오는 외침의 극복 등 매우 인상적인 모습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한글에 해당하는 고유문자 쯔 놈을 공용어 표기법으로 채택했다. 쯔 놈을 활용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하고,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 의사 소통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수 있다. 평민 정권의 특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 살지 못했다. 응우옌 반 후에는 황제에 즉위한지 4년만인 1792년에 사망했다. 나이 39. 너무 젊은 나이에 영웅은 갔다.

 


<참고자료>

Wikipedia, Tây Sơn dynasty

Wikipedia, Tây Sơn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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