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윤봉길인가…한국독립 세계에 각인시킨 의거
왜 윤봉길인가…한국독립 세계에 각인시킨 의거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6.24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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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에 이어 윤석열도 윤봉길의사 기념관서 정치선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9일 정치선언의 장소로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선택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20189월 황교안 전 대표가 에세이집 출판기념회를 열고 정치입문을 발표한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를 출발하는 사람들이 윤봉길 의사를 앞세우는 이유는 뭘까. 윤 전 총장측은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대한민국 독립의 밑거름이 된 독립운동가 윤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곳이라며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만든 대한민국 건국의 토대인 헌법정신을 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국민들께 보여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봉길 선서장면 /국가보훈처
윤봉길 선서장면 /국가보훈처

 

윤봉길 의사는 일제강점기인 1932429일 일왕의 생일 행사장에 수류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등을 즉사시킨 독립운동가다. 그는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정치인들이 윤 의사의 이 메시지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윤봉길 의사는 19086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해 한글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1928년에는 부흥원을, 1929년에는 월진회를 설립해 농촌계몽운동을 실시했다.

19303월 윤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중국 상하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4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훙커우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라는 상하이 신문의 보도를 접하고 의거를 결심했다.

의거 3일 전인 1932426, 윤 의사는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를 대변한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윤봉길과 김구 /국가보훈처
윤봉길과 김구 /국가보훈처

 

1932429일 훙커우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고,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40분경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 윤 의사는 앞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수통형 폭탄을 던졌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이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 등은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중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크게 감명받았다.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대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 냈다며 윤 의사를 극찬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장제스 국민당 정부이 태도가 달라졌다.

장제스는 의거 직후에 김구선생과 회담을 갖고 군사교육 지원 협약등 임시정부 지원책을 논의했다. 윤의사의 의거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독립운동가 장건상은 회고록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에서 장제스가 임정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도 안 돕다가, 윤의사 의거를 보고서 전적으로 돕기 시작했다고 소회했다.

위당 정인보는 윤봉길 추도비에 중국은 우리 독립의 큰 힘을 아끼지 아니하고 저돌하였으니, 장개석 총통이 우리 독립을 선창할 때도 윤봉길 의사가 저 때에 던지던 폭탄 소리가 귓가에 새로웠을 줄 안다고 썼다.

 

대한민국 독립이 처음 결정된 것은 2차 대전중인 19439월 카이로 선언이다. 당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한국의 독립을 반대했지만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장제스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해 한국의 독립을 카이로 회담 합의조항에 넣었다. 카이로 회담 선언문에는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에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는 특별조항이 포함되었다.

이후 19457월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재확인되었다.

우남 이승만은 도왜일기서문에서 한국 해방이 된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 주석이 솔선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창하여, 연합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은 그 원인이 윤봉길의 장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윤봉길 체포장면 /국가보훈처
윤봉길 체포장면 /국가보훈처

 

체포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19325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12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되어,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효창공원 삼의사묘역 /박차영
효창공원 삼의사묘역 /박차영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201912월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선정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상해의거 영향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카이로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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