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의 난①…홍슈취안, 天王에 오르다
태평천국의 난①…홍슈취안, 天王에 오르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6.25 19: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 100년 내란의 시작…종교의 외피를 쓰고 농민 반란 일어나다

 

24살의 이름 없는 젊은이의 환몽이 늙은 중국에 엄청난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다. 1850~1864년 사이 14년간 중국 대륙을 갈라치며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之亂)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주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계급투쟁은 종교의 외피를 쓴다고 했다. 태평천국의 난은 종교의 껍데기를 둘러쌌지만 본질적으로는 계급투쟁이었다. 홍슈취안(洪秀全)은 태평천국의 천왕(天王)이 되어 사이비 종교국가를 수립해 청조와 대항했다. 14년간 죽은 자가 얼마나 되는지 셀수도 없다. 사망자가 대략 3,000~5,000만명이 된다고 하니, 총인구 3~4억이던 시절에 인구의 10~20%가 반란 과정에서 죽어 나간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은 또 중국 100년 내란의 시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이때부터 붕괴되기 시작해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하고, 그후 세워진 중화민국은 군벌 싸움과 국공내전, 일본 침략에 시달린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게릴라부대가 최종 승자로 공산정권을 수립하기까지 중국 대륙은 대혼란을 겪게 된다.

 

때는 1837, 중국 광둥성 화현(花縣)이라는 곳에 사는 홍슈취안은 세 번째 과거시험에도 낙방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실망한 나머지 심한 열병을 앓고 드러누웠다. 먹고살 길이 막막한 집안의 어머니는 막내 아들이 똑똑하다 여겨 서당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32녀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집안의 기대주였다. 세 번이나 낙방했으니, 어머니를 볼 면목도 없고, 자책감도 컸다. 그는 40일 동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혼수상태를 헤메다가 환몽(幻夢)을 경험했다. 환몽 속에서, 그는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한 노부인이 나타났다. 노부인은 천모(天母)로 그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고 내 아들아, 네가 인간세상에 몸을 더럽혔다. 내가 너를 강가에 말끔히 씻겨주고, 이후에 다시 너의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노부인은 그를 하늘 궁전으로 데려갔는데, 그곳에 곤룡포를 몸에 걸치고 금색 수염을 한 노인이 그에게 요마(妖魔)를 베는 보검과 요마를 제압하는 옥새를 한 개 주었다. 그는 수차례 하늘 궁전을 다니면서 장형이라는 중년 남자를 만났다. 이 사람은 그에게 요마를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공자(孔子)가 경서에서 진리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며 노인에게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는 모습을 보았다.

무당을 데려오고 한의사를 데려왔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환시에서 깨어났다. 그는 키도 커졌고 외모도, 성격도 크게 변했다. 그는 의젓해지고 걸음걸이도 중후해졌다.

 

세상은 혼미스러웠다. 토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는 불어났다. 174114,000만이던 중국 인구는 1850년엔 43,000만으로 세배나 늘어났는데, 토지는 30%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1인당 경작지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땅을 팔아 일시적으로 굶주림을 피했지만 영구적으로 소작인이 되었다. 토지는 점점 소수의 지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고리대금업자들은 권력과 결탁해 토지를 매집, 1만경을 넘는 토지를 보유한 대지주가 출현했다.

이런 상태에서 만주족 지배자는 서양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했다. 청조는 제1차 아편전쟁(1839~1842)에서 영국에 패배해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동양의 질서를 주도하던 중국의 권위가 무너졌다. 정치는 부패했다. 관료는 무책임했고,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아편 거래가 합법화되면서 은()의 해외 유출이 가속화되었다. 당시 청나라에선 세금을 은으로 냈는데, 은 부족으로 물가가 폭등했다.

1840~50년대엔 자연재해도 많았다. 1847년엔 허난성 가뭄, 1849년 후베이 안후이, 장쑤, 저장 성 가뭄, 1949년엔 광시성에 가뭄이 들었다. 수해에 한재, 풍해(風害), 충해(蟲害)가 한꺼번에 닥쳐왔다.

 

홍슈취안 /위키피디아
홍슈취안 /위키피디아

 

홍슈취안은 181411, 지금의 광쩌우(廣州) 변두리인 화두(花都)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객가(客家) 출신으로, 한족 가운데서도 황하 상류에서 내려온 빈민계급이었다. 어려서 서당에서 사서오경을 배웠고, 긴 도포를 입고 수염을 기른 에드윈 스티븐스와 권세양언’(勸世良言)이란 기독교 소책자를 전해준 R. 모리슨이라는 서양선교사를 만났다. 16살부터 출세를 위해 과거시험을 세 번이나 쳤지만 떨어졌다. 그리고 환몽을 꾼 것이다.

 

환몽에서 깨어나 다시 서당 훈장 노릇을 하며 6년 동안 과거공부를 더 했다. 1843년 그는 네 번째 과거시험을 치르러 광저우로 갔다. 영국은 난징조약에 따라 광저우 시내에 진입해 주거지를 만들려고 했고, 이에 격분한 광저우 주민들은 영국인을 습격하고 돌을 던지고 살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홍슈취안은 광저우 시민들의 민족적 저항을 목격했고,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청조를 증오했다.

이번에도 홍슈취안은 낙방했다. 그는 네 번째 과거에 떨어져 낙망해 있었다. 나이가 29살에 불과해 다시 과거를 치기에 충분한 나이였다.

이 때 그에게 또다른 우연이 닥쳐왔다. 이종사촌 동생 리징팡(李敬芳)이 홍슈취안을 방문해 그가 읽지 않고 서재에 꽂아 두었던 권세양언을 빌려갔다. 그 책자는 구약성서를 발췌한 내용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었는데, 그가 두 번째 과거를 보러 가다가 만난 영국 전도사 모리슨(R. Morrison)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리징팡은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홍슈취안에게 책을 돌려주면서 읽어보라고 권했다.

홍슈취안이 권세양언을 읽으면서 6년전 꿈 속의 비결을 풀어냈다. 꿈에서 만난 노인이 상제(上帝)이고, 장형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꿈을 해몽했다는 기쁨에 어쩔줄 몰랐다. 그는 상제와 그리스도, 자신의 삼위일체를 창조해 냈고, 그가 40일 환몽에 빠진 것은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시련을 겪은 시간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책자에 묘사된 대로 스스로 세례를 행하고 하느님에게 요마를 숭배하지 않고 하늘의 법칙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는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고 칭하고 인류 구제에 나섰다.

1843년부터 그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전도활동에 나섰다. 그가 공부를 더 해 급제했더라면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을까. 그는 아마도 청조의 관리가 되어 불순세력을 탄압하는 원흉이 되었을 것이다. 시대정신이란 때론 허황된 주제다. 당시 중국의 시대정신은 이 정신착란자를 지도자로 모시고 반역을 도모했다.

 

홍슈취안(베이징혁명박물관 소장)
홍슈취안(베이징혁명박물관 소장)

 

맨처음 사촌동생 홍런깐(洪仁玕)과 객가 친구인 펑윈산(馮雲山)이 포섭되었다. 그들은 교의를 충실히 하기 위해 공자의 위폐를 파괴했다. 이런 행동으로 그는 훈장직을 잃어버렸다. 스스로 포기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고향에서 존경받는 예언자가 없었다는 성서 말씀에 따라 고향 화현을 떠나 광시성으로 가서 포교했다. 그는 아편 흡입과 도박, 술주정을 비난하고 모든 사람은 다 형제자매라는 평등주의를 강조했다.

홍슈취안은 가난과 폭압에 시달리던 객가 사람들을 중심으로 3,000여명이 그의 신생 종교에 몰려 들었다. 그는 신도들과 함께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결사를 조직했다. 홍슈취안은 하느님의 둘째 아들 자격으로 지도자로 인정되었고, 펑윈산은 하느님의 셋째 아들로, 숯굽는 노동자 출신의 양슈칭(楊秀淸)은 넷째 아들, 홍슈취안의 매부 샤오짜오구이(蕭朝貴)는 다섯째 아들로 정했다.

그들은 모세 10계명을 본떠 천조10계명을 만들었다. 상제를 예배하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상제의 이름을 멋대로 붙여서는 안 된다 7일마다 예배하여 상제의 은덕을 찬양하라

부모에게 효도하라 남을 죽이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불의와 음란의 죄를 범하지 말라 도적질이나 약탈을 하지 말라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말하지 말라 탐하지 말라.

이밖에도 배상제회의 제도, 의식, 군제를 규정했는데, 이는 중국에 비밀리에 활약하던 반청조직 삼합회(三合會)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배상제회는 광시성 서부와 광둥성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1849년엔 신도수가 1만명으로 늘어났다. 배상제회의 공자묘와 사당 훼손은 기존 사회를 흔들었고, 특히 그들이 주장하는 만민평등은 지주계급의 강한 반발을 샀다. 지주들은 18481월 사당 신상을 파괴한 혐의로 펑윈산을 체포했고, 이에 배상제회는 무리를 동원해 펑윈산을 구출했다. 서서히 지배계급과 배상제회의 계급갈등이 노출되었고, 홍슈취안의 무리는 종교의 틀을 벗어나 정치투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홍슈취안과 배상제회 지도부는 회원들에게 가산을 팔고 신변을 정리한 후에 18507월에 광시성 계평현(桂平縣) 금전촌(金田村)에 집결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홍슈취안은 38세 생일이 되던 1851111일에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 정했다. 그들은 청조에 대항하는 무장반란을 선언했다. 태평천국의 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참고자료>

임계순, 淸史-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도서출판 신서원, 2000

미매뉴얼 C.Y. , -현대 중국사(상권), 까치 2013

Wikipedia, Hong Xiuquan

두산백과, 홍수전(洪秀全)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