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은 왜 해적이 되었나…신라구의 존재
신라인은 왜 해적이 되었나…신라구의 존재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2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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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흉년에 백성들이 도적화…중국, 일본등으로 해적활동에 나선듯

 

우리 역사에 해적은 없었을까. 신라 해적이 있었다. 우리 역사서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일본 역서서엔 신라구(新羅寇)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우리가 왜구(倭寇)라고 비하하듯, 일본 역사서에도 신라 해적에 도적 구’() 자를 붙였다.

 

일본 역사서에 나오는 신라구는 장보고(張保臯)가 해적 소탕을 위해 청해진(828~846)을 설치한 이전부터 등장한다.

81112월에 신라인 약 110명이 5척의 배로 고지카시마(小近島)에 침공해 약 9명을 죽이고 100명을 사로잡았다.

811126, 신라선 20여척이 시모아가타군(규슈)의 사츠우라 해안에 상륙했다.

8133, 신라인 110명이 5척의 배를 타고 히젠노쿠니(규슈)의 고지카시마에 상륙해 주민들과 싸웠다. 101명을 포로로 삼았다는데, 조정은 신라인들을 심문하여 귀국을 바라는 자는 허락해주고 귀화를 바라는 자는 관례에 따라 처리했다.

8202, 도토우미스루가 두 나라로 옮겼던 신라인 700명이 반란을 일으켜, 주민을 살해하고 가옥을 불살랐다. 두 구니()에서 병사를 동원해 공격했지만 제압할 수가 할 수 없었다. 7개 나라에서 병사를 모아 토벌한 결과, 전원 항복했다. (위키피디아, 新羅入寇)

 

장보고가 군사기지를 만들어 해적 소탕에 나서기 이전에 신라 백성들이 해적질에 나선 것이다. 누가 해적에 나서겠는가. 약탈질에 나서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정상적인 상황에서 살기 어려운 최하층 백성들이다. 9세기초 신라에는 백성들로 하여금 해적이 되게 하는 정치적, 경제적 상항이 만들어졌다. 이 나라에서 가만 앉아 죽을 판이면, 차리라 외국에 나가 도적질이나 하자는 무리들이 생겨난 것이다.

 

9세기초 신라 백성들을 해적으로 내몬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들여다 보자.

30대 원성왕(재위, 785~798) 시기에 5년간 가뭄이 이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린다. 신라본기 원성왕조에는 이렇게 전한다.

 

2(786) 가을 7, 가뭄이 들었다. 9, 서울에 기근이 들어 곡식 33240섬을 내어 구제하였고, 겨울 10월에도 곡식 33천 석을 나누어 주었다

3(서기 787) 2, 가을 7, 메뚜기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4(서기 788) 가을, 나라의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떼가 나타나고, 도적들이 많이 일어나,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5(서기 789) 봄 정월, 한산주(漢山州) 백성들이 굶주리자 곡식을 내어 주었다. 가을 7, 서리가 내려 곡식이 상하였다

6(서기 790) 5, 한산(漢山)과 웅천(熊川) 두 주의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내어 구제하였다. (신라본기 원성왕조)

 

 

5년 가뭄에 이어 796, 797, 798년에도 가뭄과 홍수가 반복하며 농사를 망쳤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백성들의 삶은 어떠 했을까. 삼국사기 열전에 8~9세기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모습이 나온다.

향덕(向德)은 웅천주(공주)에 사는 백성인데, 흉년이 들어 전염병까지 겹치자 부보님을 공양할 길이 없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먹였다.

청주(菁州, 진주)에 사는 성각(聖覺)이라는 백성은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서 채소만으로는 봉양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다리살을 베어서 먹였다. (삼국사기 열전)

 

경주시 원성뢍릉 (사적 26호) /문화재청
경주시 원성뢍릉 (사적 26호) /문화재청

 

흉년에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은 도적이 되었다. 산속으로 들어간 도적은 산적이 되겠지만, 바다로 나간 도적은 해적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헌덕왕 재위기간(809~ 826)에는 도적떼가 발생했다는 기사가 많다.

 

7(815) 가을 8,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들이 봉기하자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8(816)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절동(浙東) 지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

9(서기 817) 겨울 10,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아지자, 임금은 주와 군에 교서를 내려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11(서기 819) , 도둑떼들이 여기저기서 봉기하였다. 임금이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붙잡아 오도록 하였다.

13(서기 821) , 백성들이 굶주리자 그 자식을 팔아서까지 생존하기도 하였다. (신라본기 헌덕왕조)

 

절동(浙東) 지방은 중국 당송 시대의 행정구역으로, 오늘날 저장성(浙江省) 서북쪽 지역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이 기사를 쓰면서 중국 사서 당회요(唐會要) 신라전을 옮긴 것 같다. 굶주린 백성 170명이 우르르 몰려가서 먹을 것을 구해왔다는 사실은 해적활동을 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여기저기서 봉기한 도적떼들 가운데 일본 쓰시마, 규슈를 향해 간 해적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기록이 일본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13회에 걸쳐 826명의 신라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일본 학자들의 분석도 있다. (佐伯有淸, ‘조선계 씨족과 그 후예들’, ‘고대사의 혼미를 살핀다’)

 

이 시기에 황해도 지역에 해적 유사집단의 존재가 확인된다. 전남 곡성 태안사에 있는 적인선사탑 비문에 적인선사 혜철(惠哲)814년 경에 당나라로 가던 중, 죄인의 무리(罪徒)가 군감(郡監)에 붙잡혀 함께 배를 탔는데, 황해도 황주 연안에서 30여명이 내려 참형에 처해지고 혼로 남았다는 구절이 있다. 처형자들의 죄명은 밝히지 않았지만, 연해안을 약탈하던 해적들이 아니었을까. (권덕영, 고대 동아시아 해역의 신라 해적)

 

정치적 혼란도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한 요인이다.

헌덕왕 14(822) 아버지 주원(周元)이 임금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웅천주(熊川州, 공주) 도독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킨다. 헌창은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 원년이라 하고, 무진완산청주사벌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들과 여러 군과 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전라도·충청도·경북 일부를 장악한 반란세력은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등 경기·황해,강원도로 세를 넓혔다. 나라가 두조각 난 것이다. 이 반란으로 도당 239명을 죽였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사적 제308호 완도 청해진 유적 전경 /장보고기념관
사적 제308호 완도 청해진 유적 전경 /장보고기념관

 

헌덕왕이 죽고 그의 아우 흥덕왕이 보위에 오르자, 당나라에서 군벌 세력에 기여했던 장보고가 중국을 두루 다녀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었습니다.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적들이 백성들을 약탈하여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진언한다. 이에 흥덕왕은 즉위 3(828)에 군사 1만명으로 청해진을 설치해 해적 소탕에 들어간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기간(828~846)에 일본 사서에 신라구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다. 장보고가 청해진에 1만 군대를 조직할 때 해적 또는 도적화한 유민들을 기용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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