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광업의 역사…고대 철 생산에서 출발
우리나라 광업의 역사…고대 철 생산에서 출발
  • 아틀라스
  • 승인 2019.03.1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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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시대에는 관에서 광업 주도…조선말기에 광산 해외 매각도

 

고대의 광업

우리나라에선 고대에서부터 광업이 존재했다. 철광석과 석탄이 나왔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서기 3세기 중국 진()나라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 , 왜가 모두 와서 얻어갔다. 장사를 지낼때는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 곳에서 생산된 철이 두 군(낙랑과 대방)에 공급된다.”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여기서 나라()는 가야국을 의미한다. 가야의 철 생산 기술이 철의 종주국으로 알려진 중국의 식민지 낙랑과 대방으로 수출될 정도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다.

경남 다호리 유적에서는 주조한 철기 뿐아니라, 더욱 발전된 단조 기술로 만든 다양한 철기가 발굴됐다. , , 화살촉등 무기류와 도끼, 괭이, 낫 등 농기구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어 이 지역이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철기 생활을 했음을 보여준다.

고대 사회에서 철은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철로 만든 무기는 구리보다 띄어났고, 금새 무뎌지는 청동기보다 강하여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녹이 잘 슬어 장신구로서의 매력은 적었지만, 지배자 집단에겐 철이 매력적잉덨다. 철을 확보한 부족은 주변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잉여 생산물을 확보할수 있었다.

삼국시대가 형성되기 이전에 가야가 한반도 남부에 강한 세력을 형성할수 있었던 것은 철의 대량생산 때문이었다. 이는 그만한 철광산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북 고령의 대가야 유적지의 철 가공 모형 /사진=김인영
경북 고령의 대가야 유적지의 철 가공 모형 /사진=김인영

 

 

우리나라 역사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진평왕조에 “31(서기 609) 봄 정월, 모지악(毛只嶽) 아래의 땅이 불에 탔다. 불탄 넓이가 4, 길이가 8보였으며 깊이가 5척이었다. 1015일에 이르러 꺼졌다.”는 대목이 나온다. (三十一年 春正月 毛只嶽下地燒 廣四步 長八步 深五尺 至十月十五日滅)

삼국사기 무열왕조에는 “4(서기 657) 가을 7, 일선군(一善郡)에 홍수가 나서, 빠져 죽은 사람이 3백여 명이었다. 동쪽 토함산(吐含山)의 땅이 불타더니 3년 만에 꺼졌다는 구절도 있다. (四年 秋七月 一善郡大水 溺死者三百餘人 東吐含山地燃 三年而滅)

모지악이 어디인지 분명치 않으나, 삼국사기의 두 기사를 보면,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의 갈탄지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국립박물관에 가 보면 신라시대 금관과 금귀거리 등 금붙이 세공품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신라를 금()의 나라라고 불린다. 그만큼 금이 생산되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철기시대는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철은 역사시대를 연 광물이다. 철을 소유하면서 우리민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 광업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는지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없지만, 기록과 유물을 통해 보면, 삼국시대부터 땅에서 광물자원을 캐내는 광업이 형성되었다고 볼수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유달리 전쟁이 잦았다. 거란, , , 왜와의 전쟁을 벌였고, 무기 수요가 늘었다. 게다가 농기구류 제작으로 철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 났다.

고려시대 광업은 국영이었다. 철의 수요가 늘었다. 가래, 호미, , 작두 등 농기구가 모두 강철로 만들어 졌고, 화로, 가마 등의 철제품들도 만들어 졌다.

철광산을 철소라고 불렀다. 주요 철소로는 다인철소(충청도 충주목), 우양촌철소(전라도 전주), 수다철소(전라도 무안), 기평철소(경기도 지평), 우봉철소(황해도 우봉), 철소리(전라도 무안) 등이다. 이밖에 동계(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의 철원, 안변, 황해도의 해주, 염주(연안), 안주(재령), 경기도의 지평, 충청도의 충주 및 전라도의 나주(철야현) 등에 철소가 있다.

금광산은 금소라 불렀다. 옥사금소(충청도 충주목 홍주산), 금생소(충청도 공주), 거질물금소(충청도 대흥), 가림금소(충청도 가림), 금곡소(전라도 보성), 며력소(전라도 보성), 황금소(경상도 금산), 금천소(경상도 함창), 금암소(전라도 진산), 금의곡소(충청도 단양) 및 금마소(강원도 원주) 등이 있었다. 중소규모의 사금산지도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충청도 공주 및 전라도 보성 일대로 알려져 있다.

은광석 생산지는 은소라 불리웠다. 서해도 곡주, 서해도 수덕, 강원도 명주 정선현, 경상도 신녕 리지은소 등이 전해지고, 배음은소(충청도 홍주목), 신은소, 산즙은소, 초자은소 및 압호은소 등이 있었다.

구리 광산은 동소라 불리웠다. 고려의 동은 고려동이라 하여 질이 좋아 당시에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고려동은 질이 우수해 송나라에서도 이를 구입하여 화폐·그릇 등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식기류 제작, , 부처, 화폐 및 거울 등의 제조에 사용되었고, 아연과 합금하여 여러 가지 놋그릇을 만드는데 이용되었다.

동소는 경상도 창원지방에는 창원동소, 동천소 등 큰 동광산마을들이 있었고, 경상도 고성지방에도 석지동소, 유식동소, 우차보동소 등이 있었다. 전라도 룡담지방에는 동향소가 있었으며 당진, 금산 등지에도 동광석 생산지들이 있었다. 이 밖에도 평안북도 철산근방과 황해도 수안, 장연지방에서도 동이 생산되었다.

이밖에 청동을 만들 때 필요한 아연 광산도 있었다. 평안도 은산지방, 항해도 서흥과 봉산일대이며, 그 외에 강원도 금성, 회양 등지와 경상도 창원지방이 있다.

비철금속으로는 고려청자의 원료로 쓰이는 백토·장석·도석·고령토 등이 개발되었다. 전국에 자기소도기소등으로 불리는 도자기 생산지들이 있었고, 여기서 고령토가 생산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광업은 국영에서 시작해 민간으로 이양되는 과정이었다.

김종석씨의 저서 한국광업개사를 인용하면,

< 1> 건국후 세종 12년까지의 40년간

금의 사용이 승지 이상의 고관에 국한되고 금의 채굴도 군인이나 관리들이 직영했다. 철은 19개읍에 민영 야철장을 설치하였고, 그 규모에 따라 일정량을 세금으로 징수했다.

< 2> 세종 13년에서 중종 25년까지 100년간

금을 민간인에게 채굴하도록 하되 전량을 관용으로 매입했고, 노임을 포목으로 지급했다. 전국 각지에서 여러 종류의 금속광물이 발견되고 채굴되었고, 철의 산지도 82개소에 달했다.

< 3> 중종 26년에서 영조 48년까지의 240년간

이 때부터 각종 광물의 민간채굴을 허용하고 각 도에 채광견차관을 파견하여 세금징수를 전담하도록 했다. 은전담관 수세관만 해도 41개 읍에 설치되었으나 농경지 피해가 늘어나자 1777년에 이르러 금은광의 채굴이 전면 금지된 때도 있었다.

< 4> 영조 495년에서 순조 32년까지의 60년간

이 때에는 금은의 채굴장이 3,000개소나 되었다고 한다.

< 5> 헌종조에서 한말까지 70여년간

농경지 이외의 지역에 금은광을 허가했고, 세금으로 거둔 금이 부족할 시에는 군이나 관에서 직접 채굴했다.

외국인에게도 광업을 허가한다. 1891년에 일본인에게 10년간 기한으로 경남 창원 소재 용장금광산의 채굴권이 허가된 것을 비롯, 1896년에 러시아인에게 함북 경원 종성의 사금광이, 평북 운산의 금광채굴권이 미국인에게 각각 허가가 되었다.

고종 34년인 (1897)에는 독일인에게 강원도 금화 소재 금광채굴권이 허가되었는데 25년 기한으로 이익금의 25%를 조정에 납부하는 조건이었다. 1899년에 영국인에게 평남 은산금광의 채굴권이, 1900년에 일본인에게 충북 직산의 금광채굴권이 각각 허가되었다. 1905년에는 한성광업회사에 황해도 수안광산의 채굴권이 허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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